[독자기고]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7)
[독자기고]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7)
  • 의령 인터넷 뉴스
  • 승인 2022.04.28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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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 땅 이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상을 보는 방법, 독특한 자연환경, 고유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땅 이름은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산을 지키고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의령문화원에서 펴낸 우리고장 땅 이름, 宜寧地名, 의춘지, 의령군지 참고했다.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무상茂上

‘무상茂上’은 의령읍 무전리茂田里의 마을이다. 무상茂上은 무전茂田의 상촌上村이라는 뜻이다. 토박이들은 무상마을을 무동의 ‘웃마실’ 혹은 ‘웃동네’로 불렀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무동茂洞이 무전리茂田里로 바뀌면서 ‘무상茂上, 무중茂中, 무하茂下’라는 지명이 생겼다. 무상에는 소입과 구룡동에서 이주한 진양 강씨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마을 입구에서 보면 무상마을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마을 앞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마을 앞에 늘어서 있다. 소나무 숲은 마을을 보호하고 좋은 기운을 보충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나 주민들이 소나무 그늘이 농사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한 그루씩 없애기 시작하여 이제는 네 그루만 남아 있다. 마을 앞 은행나무와 뒷산 왼쪽에 있는 모과나무 그리고 뒷산 오른쪽에 있는 배롱나무가 정삼각형을 이루며 마을의 균형을 잡고 있었으나, 모과나무는 팔려 나가고 배롱나무와 은행나무만 남아 있다.

마을 뒷산에는 용덕 가락으로 이어지는 ‘서나무재’ 혹은 ‘서나무고개’가 있는데, 고개 먼당에 큰 서나무(서어나무)가 있어서 이렇게 불린다. 무상 서쪽에 있는 골짜기는 ‘애기당골’이라 불린다. 골짝 안에 조그만 암자庵子가 있었는데 아이를 가지고 싶은 사람이 암자에 시주하고 불공을 드리면 아들을 낳게 되는 등 큰 영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뒷산에는 애국지사 강제형 선생의 묘소가 있다.

○애국지사 강제형姜齊馨 선생

선생은 1889년 3월 28일 용덕면 죽전리 183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의령읍 무전리 산 45-1에 안장되었다. 1919년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되자 의령에서도 3월 14일을 만세운동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 준비를 했다. 정용식· 최정학·이우식·김봉연 등 의령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청년들이 당시 용덕면 면장이었던 선생에게 독립선언서 등사를 요청했다. 이에 선생은 흔쾌히 승낙한 후 면서기 전용선田溶璿·최병규崔秉圭 등에게 면사무소의 기구를 이용하여 수백 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하고, 그는 직접 의령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를 총검으로 해산시킨 일본경찰과 군대는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 때 선생이 체포되었으며 진주재판소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으나 일제경찰에 당한 고문의 여독으로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무중茂中/하지동/화주동華柱洞

‘무중茂中’은 의령읍 무전리茂田里에 속한 마을이다. 무동茂洞의 가운데 뜸이기 때문에 무중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화주동華柱洞’이나 ‘하지동’으로 불렀다. 화주동/하지동이라는 이름은 ‘화려하게 장식한 기둥이 서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기둥은 무상마을 앞 소나무 숲이 시작하는 지점에 있었다. 현재 무상 마을 앞 ‘숲속의 대장간’ 표지판이 서 있는 곳이다.

사진=화주가 서 있던 무중마을 입구
사진=화주가 서 있었던 무상마을 입구

‘화주華柱/하지’는 긴 막대기 위에 용머리 모양의 나무조각을 붙이고 붉은 색칠을 한 긴 기둥이다. 마을 안에 큰 경사가 있거나, 집안일로 치성을 드리거나, 또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거나, 벼슬이 높아진 사람이 있으면 마을 어귀와 조상의 산소 밑에 높다랗게 화주를 세우기도 했다. 무중마을에 진사進士(강정희)가 나왔을 때 세웠던 것이 마지막 화주였다고 한다. 이 때 세운 화주는 1960년대 까지도 마을 어귀에 서 있었으나 외지 사람이 몰래 이 화주를 잘라 가져갔다고 한다. 귀중한 문화유산이 허망하게 사라진 것이다.

○ 의병장 강언룡

무중에는 의병장 강언룡姜彦龍(1545~1613) 장군의 묘소가 있다. 장군은 곽재우 의병부대에서 무기와 군수를 담당하는 치병治兵을 관장했다. 공을 기리는 재실 봉양재鳳陽齋가 묘소 가까이 있다. 묘소의 상석에 있는 글씨는 판독하기 어려우며, 망부석은 좌우에 있다.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행 유곡도찰방 진주강공 휘 언룡지묘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幽谷都察邦晉州姜公諱彦龍之墓라 적힌 비석이 서 있다. 이 비석은 갓 얹은 형태이고 높이는 180cm, 폭 56cm, 두께 16cm이다.

○ 고망재高望齋

사진 =고망재 전경
사진 =고망재 전경

무전리 입구 고개를 넘어 왼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김해 허씨 재실인 고망재高望齋가 있다. 고망재라는 이름은 “높은 언덕처럼 높은 조상의 덕을 숭상한다”는 의미이다. 재실 바로 뒷편에는 김해 허씨 예촌공 허원보와 그의 아들 허찬 공과 허찬의 외손자 이채李寀묘소가 있다. 허원보의 둘째 아들 허찬(許瓚:1481-1535년)은 퇴계退溪 이황(李榥:1501-1570년)을 맏사위로 맞았다. 그래서 가례가 퇴계선생의 처가 동네가 된 것이다. 허씨 부인은 둘째 아들 채寀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별세했다. 그래서 둘째 아들 채寀는 의령 가례 외갓집에서 컸다. 그러나 몸이 워낙 약했다. 결국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 때에 아들 채寀는 2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를 무중에 장사지낸 것이다. 그의 부인 류씨는 자식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었다. 이 분이 바로 ‘퇴계선생과 둘째 며느리’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최근에 무전리에는 포천에서 대장간을 하시던 분이 들어와 ‘숲속의 대장간’을 열었다. 또 맞은편에 부부가 세 따님과 함께 귀촌하여 도자기를 구워 판매하고 있다. 그는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 강한 불로 유약의 느낌이 나게 하는 남다른 방법으로 도자기를 굽고 있다. 전문적 기술을 가진 분들이 귀촌하여 새로운 농촌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으니 지역민이 관심을 가지고 각자의 방법으로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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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림 2022-05-03 09:30:17
의령에 애국지사들이 많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