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宜寧)의 땅 이름 유래(地名由來)와 역사이야기
의령(宜寧)의 땅 이름 유래(地名由來)와 역사이야기
  •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사
  • 승인 2022.01.27 13:59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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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사진=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사람에게 이름이 있는 것과 같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 의령 지역의 조상들이 이 땅에 정착하며 살면서 그 땅에 알맞은 지명을 정하고 사용해 왔다. 지명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므로 곳곳에 지명을 붙여 많은 지명이 축적되어 왔다. 지명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상을 보는 방법, 독특한 자연환경, 고유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 속에 우리 조상의 사고와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도 있고 조상의 생활양식을 나타내는 지명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명은 고장의 문화발전 역사를 담고 있는 가치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의령의 어느 골 어느 들 이름 하나 제 각각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 필자가 생각하기에 후대에 널리 알려줄 필요가 있는 것을 추려 싣고자 한다. 이 글은 허백영 편저《우리고장 땅 이름》과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 의령(宜寧) 지역 지명

의령 지역은 신라시대 장함현(獐含縣)으로 불렸고 장함현의 읍지는 지금의 칠곡면 내조리였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의령으로 개명하였고 이 이름은 ‘마땅히 평안히 살아야 한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의령읍 지역은 풍덕리(豊德里), 덕곡리(德谷里), 만천리(萬川里) 등 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풍덕은 지금의 의령읍 중심부와 무전, 정암 등이 속했고 덕곡은 덕실, 상리, 중리, 하리 지역이며 만천은 대산, 만천, 압곡 등 남강변 마을이다. 의령읍 과 주변의 지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칠성바우 모티, 칠성암(七星巖), 칠성바구

대의 방면에서 의령으로 올 때 의령초입에서 만나는 것이 바로 ‘칠성바위 사투리로 칠성바우(七星岩)’이다. 칠성바위는 시외버스 주차장 근처의 옛 신작로 너머 논 가운에 있었다. 이 일곱 개의 바위가 북두칠성의 형태로 놓여 있어 ‘칠성암(七星巖), 칠성바위’라 불렸다. 칠성바위 모퉁이를 돌면 의령읍내에 들어서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모퉁이를 사투리로 ‘칠성바우 모티’라고 부르기도 했다. ‘칠성바구 모티’는 의령의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여기쯤 오면 의령에 다 온 것이나 진배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막이 있어 나그네가 쉬면서 갈 길을 채비하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이는 홀가분하게 쉬어 가던 곳이었다.

이 일곱 개의 바위군은 선사시대 고인돌로 추정되는데 특별히 바위를 북두칠성의 형태로 배열하였다. 고문헌에는 의령 사람은 마음이나 성질이 굳세고 사나우며(俗尙强悍) 어버이에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심이 깊고(裝忠孝) 학문에 힘쓰는(勵文學)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고인돌을 북두칠성 형태로 배열한 것으로 추측하건대, 의령에 살았던 고대인은 땅의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관찰하며 이상과 낭만을 추구하는 기질 역시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귀중한 칠성바위가 1970년대 주변 경지정리를 하는 과정에 사라졌다. 매몰되었는지 다른 곳에 이전했는지 아니면 다른 돌과 함께 구덩이를 메우는 데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이 지역 지표조사라도 하여 그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의령지역 고인돌은 정곡면 석곡리 7기 오방리 4기, 화정면 상정리 10기 가수리 1기, 가례면 가례리 7기 수성리 4기, 칠곡면 신포리 선돌 7기, 부림면 경산리 2기 신반리 2기, 의령읍 중동리 7기가 산재해 있다. 흩어져 있는 고인돌을 한 곳에 모아 ‘북두칠성 고인돌 공원’을 만들면 역사 문화 연구 자료와 관광자원으로서 그 가치가 클 것으로 생각한다.

 

○부모다리, 소자다리, 부모교(父母橋)

‘부모다리’는 외시(남산동) 입구 도랑에 놓인 징검다리이다. ‘소자다리’라 하기도 한다. ‘효자(孝子)’를 의령 사투리로 ‘소자’라 발음하기 때문에 ‘효자다리’를 ‘소자다리’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이름의 유래는 옛적에 의령 외시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다. 그 과부에게 십여 세가 되는 아들 둘이 있었다. 그 과부는 개울건너에 사는 홀아비를 사모하여 밤마다 아이들이 잠들면 몰래 개울을 건너 그를 만나러 다녔다. 이런 생활이 오래 계속 되자, 아이들도 자연히 자기들이 잠들면 어머니가 개울을 건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형제는 밤에 몰래 나가 정인을 만나는 어머니를 미워하는 대신에 오히려 어머니가 맨발로 개울을 건너면 발이 얼마나 차가울까 어머니를 걱정하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마실을 편히 다녀 올 수 있도록 큰 돌로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사진=부모교
사진=부모교 표지석

동네 사람들이 두 아들의 속 깊은 행동을 알게 되면서 이 징검다리를 ‘효자다리’나 ‘부모다리’로 부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징검다리는 없어지고 나무다리 다음에 현대식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 후 개울을 복개하고 도로를 만들면서 부모다리를 없애고 대신 그 자리에 부모다리 표지석만 남겼다. 그 표지석은 현 경남은행 의령지점 앞 도로 가운데 있다. 표지석이 도로 한 복판에 있으니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표지석을 찾는 것조차 힘들게 되어있다. 정말 애석한 일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이 콘크리트 벽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사려 깊은 효자의 사연을 담고 있는 부모다리 이야기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옛 부모다리 자리 적당한 곳에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더 적극적인 대책은 복개한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옛 개울에 있던 징검다리 부모다리를 멋지게 복원하는 것이다. 개울과 부모다리를 복원하면 서울의 청계천과 같은 아름다운 친수공간과 관광자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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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웅 2022-02-08 20:17:29
좋은 글입니다.

끝까지 정독을 하다보니
의령에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복개천을 걷어내고 정비하여
읍내 중심으로 맑은 물이 흐르게 하고
소자다리의 마음도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의령국민체육센터 공원부터
남산초등학교에 이르는 의령읍 시가지 중심을 관통하는 긴 복개천과 그속 을 흐르는 물이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고 행복마을 신시가지 뒤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실하천은 모두가 기피하는 장소가 되었음은 의령사람이면누구나 아는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도시재생

다시 맑은 물이 흐르는...,

기다려봅니다 ㅎ

이유림 2022-02-01 22:43:32
코로나시대에 북두칠성 공원 같은 곳이 생긴다면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의미있는 주민들의 휴식공간이 될 수 있겠네요~

이영준 2022-01-28 11:57:35
개울과 다리를 복원해서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면 멋지겠네요~!!

한민지 2022-01-28 09:38:05
글이 너무 좋습니다 아주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읽었습니다 의령에 이런 유래와 역사가 있는줄 몰랐는데 정말 유익하고 재밌는 글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