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8)
[독자기고]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8)
  •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사
  • 승인 2022.05.13 12:0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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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 땅 이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상을 보는 방법, 독특한 자연환경, 고유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땅 이름은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산을 지키고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의령문화원에서 펴낸 ≪우리고장 땅 이름≫, ≪宜寧의 地名≫,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사진=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사진=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정암리鼎巖里

정암리鼎巖里는 의령읍에 속한 법정동리이다. 정암리는 ‘정암鼎巖마을과 백야白也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암마을은 남강변에 있다. 남강은 의령의 동남쪽 70리를 흐르는 데 강을 따라 크고 작은 나루가 많지만 그 가운데서 정암나루는 가장 큰 나루이자 호남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요지였다. 옛날에는 구포에서 어물과 소금을 실은 배가 낙동강과 남강을 타고 올라왔고 그 배가 의령의 토산품인 땔감, 옹기, 곡물, 한지, 피륙 등을 싣고 내려갔다. 그래서 정암나루에는 크고 작은 배가 줄지어 왕래했다.

사진=정암나루 나룻배(제공: 허백영)
사진=정암나루 나룻배(제공: 허백영)

남강南江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화정면 지역에서는 남강을 염창강濂滄江, 정암에서는 정강鼎江 혹은 정호鼎湖, 지정면 성산城山마을 앞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에서는 기강(岐江:거름강) 혹은 기음강歧音江이라 불렀다. 정암에서 정호라 불렀던 이유는 남강 상류에 진양호가 건설되기 전에는 홍수가 나면 정암, 월촌, 백야, 무전 일대가 모두 강이나 습지로 변하여 호수처럼 넓어 보였기 때문이다. ≪용사일기≫에 “곽재우는 두 현의 병졸을 거느리고 정호鼎湖와 세간世干리 두 곳에 큰 진을 설치하였다.”라고 나와 있다. 이처럼 의령에서는 남강을 정호鼎湖라 불렀다.

 

○ 정암철교

사진=6.25전쟁 때 파괴된 정암 철교
사진=6.25전쟁 때 파괴된 정암 철교

정호에는 함안과 의령을 연결하는 나루가 있었는데 그 나루가 바로 정암나루 혹은 정암진鼎巖津이다. 나루에는 뱃사공이 있고 그 뱃사공이 부르는 흥겨운 노래가 있다.

 

○ 정암 뱃사공의 노래

정암에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

우리님 오시는데 길마중 갈거나

너이가 날같이 사랑을 준다면

까시밭이 천리라도 맨발로 갈거나

간다 못간다 얼매나 울었던고

정기장 마당이 한강수 되노라

자굴산 상상봉 서있는 저 소나무

날캉도 같이도 외로이 섰는구나

정암에 강물이 이내술 같으며는

의령읍내 저건달 내친구 될거나

의령에 남산이 내돈 같으면

신길이 점방이 내점방 될거나

(후렴) 아이고 되이고 뚜댕구 뚜댕구 상화가 났네

※ 정암 뱃사공의 노래: 의령문화원, ≪의령의 구비문학≫, 183쪽

※ 까시밭이: 가시밭, 가시밭 같은 험한 길

날캉도: 나와 같이

신길: 신길(神吉: 간지기)로 불리던 일본인, 그는 군인출신으로 의령에 와서 상점을 경영하면서 세도를 부린 악질로 소문난 사람(지금 읍사무소 가기 전 왼편 새 도로난 자리가 ‘신길’의 점방자리이다)

정암나루/정암진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현대식 철교가 가설되면서 사라졌다. 그 후 6.25전쟁 때 북한인민군이 의령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남강·낙동강이 유엔군·인민군의 최전방이 되었다. 후퇴하던 국군이 인민군의 도강을 저지하기 위하여 정암 철교를 파괴했다. 철교가 파괴되자 인민군은 구룡산(남산) 대밭에서 베어낸 왕대로 만든 부교로 도강한곤 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58년 남아있던 다리의 일부를 살려 상부는 2간 철골트러스 형식으로 재건하고 파괴된 부분은 새로운 교각을 세워 철근콘크리트 교량으로 건설하였다. 정암철교는 주변 정암루, 솥바위와 서로 어우러져 멋진 경치를 제공하기 때문에 2014.10.30.에 국가등록문화재 제639호로 지정되었다.

 

○ 솥바위鼎巖

사진 = 남강 솥바위
사진 = 남강 솥바위

정호 가운데는 천연바위섬이 있는데, 물 위의 모습이 마치 가마솥의 솥뚜껑 같아 보이고 물아래는 솥의 발처럼 세 개의 바위기둥이 있다. 전체 모습이 솥처럼 생겨서 사람들이 이것을 ‘솥바위’ 혹은 ‘정암鼎巖’이라 불렸다. 마을 사람들이 섣달 그믐날에 솥바위에 왼새끼줄(금줄)을 치고는 동신제, 용왕제를 지내고 가뭄이 오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솥바위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조선 후기에 어느 도인이 이 솥바위에 앉아 놀면서 "앞으로 솥바위 반경 20리 안에서 나라의 부자 세 명이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솥바위 반경 20리 이내에서 삼성의 호암 이병철, 금성( LG)의 연암 구인회, 효성의 만우 조홍제가 태어났다. 이렇게 솥바위에는 신비로운 전설이 있고 그 전설이 현실이 된 것을 볼 때 우리의 가슴속에는 환희가 솟고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된다.

 

 
○ 정암루鼎巖樓

정암루는 구룡산(남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강을 만나 끊어지는 바위언덕 위에 서 있다. 정암루 자리에는 조선 중기 대제학을 지낸 용재 이행이 귀양살이를 하며 지은 취원루가 있었다. ≪의춘지≫에 보면 이행이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취원루 정암가에 있었다 聚遠樓 在鼎巖上

용재 이행의 시에 이르기를: 容齋李荇詩曰

주인의 정사가 매우 능숙하니 主人政事少全牛

칼을 놀려 새로 백척의 누각을 지었네 遊刃新修百尺樓

사해문장(姜渾)이 마침 한번 돌아보았으니 四海文章會一顧

천년 명승지 틀림없이 길이 전하리라 千年名勝定長流

정암 나루 가을 물빛 밝아서 구경할 만하고 鼎津秋水朝堪玩

자굴산 봄빛은 아득하게 떠 있는 듯하네 闍崛春光遠欲浮

뒷날 누각 올라 굽어볼 때 내가 이미 늙었겠지만 陀日登臨吾便老

옛 술과 산은 은근하게 잘 있겠지 慇懃好在舊林丘

1935년 지역의 유림과 유지들이 임진왜란 곽재우 장군의 승전지인 정호가 내려다

보이는 취원루 자리에 정암루를 중건하였다. 그 후 6.25전쟁으로 소실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1963년 군민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정암루로 이어지는 고즈넉한 돌계단을 올라가면 눈앞에 절경이 펼쳐진다. 그 경치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지만 보름날에 보는 것이 제일 운치가 있다. 흰 모래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진주를 갈아 뿌려놓은 듯하고 남강의 푸른 물결은 보는 눈을 청량하게 씻어준다. 생활에 찌든 피로와 근심이 말끔히 씻기는 후련한 느낌과 모든 사물이 정지된 것과 같은 정적미를 눈으로 맛볼 수 있다. 이런 장관을 누대 난간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고 보아도 좋고 대청마루에 퍼질러 앉아 보면 더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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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림 2022-05-16 22:39:01
아름다운 경치지만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도 함께 있었군요~

김동혁 2022-05-13 19:14:41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잊힌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봐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