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6)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6)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2.09.23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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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사진=의령향토문화연구소 김진수
사진=의령향토문화연구소 김진수

 

□대산리 오감(吾甘)

‘오감(吾甘)’은 의령읍 대산리(大山里)의 행정마을이다. 화양면(華陽面) 중촌(中村)에 속했다가 의령읍 대산리(大山里)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오감동(五甘洞)’으로 기록되어 있고 <의령현지도>에는 오동(五洞)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개편 이전에도 ‘오감(五甘)’으로 불러 왔던 것이다. 현재는 ‘나 오(吾)’자를 쓰지만 이들 자료에는 ‘다섯 오(五)’로 기록되어 있다. 허백영 의령문화원장이 쓴 ≪우리 고장 땅 이름≫에 의하면 ‘오감(吾甘)’이란 지명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이전에 이 마을(오감)에 경주최씨 일가가 정착하였다. 경주 최씨 집안에서 만석꾼 부자가 나왔고 열두 대문에 고래등같은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다. 이 최 부자의 선산이 마을 서남쪽에 있었는데 그 자리가 ‘까마귀등’(烏嶝)으로 불리는 명당이었다. 까마귀등 앞으로 흐르는 큰개(大浦)라는 물길이 있었는데 이 냇물이 맑아서 꼭 거울 같았다. 그래서 까마귀(鳥)산과 거울(鑑)같이 맑은 물길이라는 두 자를 합하여 ‘오감(烏鑑)’이라는 지명을 쓰게 되었다. 그 뒤 이 마을에 여러 성씨 집안이 들어오면서 까마귀라는 말이 불길하여 까마귀 ‘오(烏)’자를 ‘다섯 오(五)’로 썼다가 뒷날 다시 ‘나 오(吾)’로 바꾸었고 ‘거울 감(鑑)’자도 ‘달 감(甘)’자로 바꾸어 오감(吾甘)이 되었다고 전한다.”

보통 민간에서 까마귀는 불길한 새로 알고 있으나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까치나 까마귀 혈자리에 집을 짓고 살면 자손이 번창하고 살림도 넉넉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의령에는 까마귀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있다. 까막실(낙서면 부곡), 까마귀 둥지(부림면 오소) 그리고 까마구가 숨는 곳(낙서면 오은) 등이 까마귀 관련 지명이고 이 마을은 모두 학식 있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고 부유하다.

동네 앞을 흐르는 남강을 이 지역에서는 염창강이라 했다. 여기에는 염창나루(濂滄津)가 있고 나루에서 멀지 않는 곳에 십완정(十翫亭)이 있었다. 십완정은 조선시대 문장가인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지은 정자이다. 십완정은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 즉 영남지역의 58명승지를 그린 그림에 포함될 만큼 경치가 좋은 곳이다. 이 명승첩에 의령에서는 십완정과 정암루가 들어가 있다.

○십완정(十翫亭)

사진=십완정터에서 바라본 남강 모습
사진=십완정터에서 바라본 남강 모습

조선시대 문장가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탄핵받고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게 되자 만천리 근처의 경치 좋은 곳에 십완정을 짓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정자 건물은 사라지고 없으며 유허지 비석만 있다. 위치는 의령군 만천리 산117에서 강쪽에 있다. 1040번 지방도 확장 공사를 하면서 정자터 근처 산허리를 깎고 절벽 쪽 암석을 정리하여 옛날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주변 경치는 여전히 아름답다.

사진 =십완정 유허지 비석
사진 =십완정 유허지 비석

정자터 앞에는 방어산이 우뚝 솟아 있고 뒤쪽은 구룡산이 병풍을 두른 듯 호위하고 있다. 서쪽으로 읍강정이 있고 강 건너 지수쪽에는 관란정이 있고 동쪽으로는 정암루가 서 있어, 십완정은 남강변에 늘어선 정자들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 여러 정자를 거느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 중의 한 명인 호음(湖陰) 정사용(鄭士龍)이 자리를 보았으니 허투루 잡지 않았던 것이다.

 

○수원정 나루터

십완정 정자터에서 강변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강으로 연결되는 곳에 옛 수원정나루터가 있었다. 이 나루를 이용하여 건너편 방어산 아래 박곡 마을로 왕래하였고 함안 눕실이나 진주 지수 쪽으로 다니기도 했다. 1970년대만 해도 강가에 오솔길이 있어 학생들이 소풍을 가거나 마을 사람들이 내왕할 때 강가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대밭꼬/대밭고개

마을 북쪽 나직한 언덕고개를 대밭고개라 부른다. 이곳에는 옛날 조산과 서낭당이 있었다. 서낭당은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 상여나 장례행차가 지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네 뒤 야트막하게 흘러내린 산줄기가 ‘붓등’인데 명당자리라 한다. 이 이름은 부자지(남자의 성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다른 이름으로 ‘붓바구’, ‘붓두덩’ 등으로 불린다. 그리고 강 건너 함안 땅에는 여자의 음부를 닮은 산과 골짜기가 있다. 보통 조개등, 조개골로 부르는데 여근곡이라 한다.

○심기일 장군 묘

사진 =심기일 장군의 묘
사진 =심기일 장군의 묘

이쪽의 붓등(陽)과 건너 함안쪽 조개등(陰)은 서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며 마주보고 있는데 보통 양의 기운이 있는 곳이 명당이라 한다. 이 명당자리에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함께 왜군을 물리친 심기일(沈紀一)장군의 묘소가 있다.

심기일 장군은 가정 을사년(1545)에 태어나 1610년에 돌아가셨다. 자는 남중(南仲), 호는 호서(湖西)로 의령 만천(萬川) 출신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호걸스런 용모와 대장부의 기상이 있었고 경서, 역사, 음양, 병서 등에 두루 능하여 당시 사람들의 칭송을 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직장공이 재물을 흩어 의병을 일으켜서 출발하려는데 병을 얻어 출발할 수 없게 되자 공이 대신 가기를 청하고 바로 망우당 곽공의 진영에 달려갔다. 곽재우 장군이 공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직장에게 이런 아들이 있었구나” 하고 군무를 맡겼다. 이에 공은 안기종, 강언룡, 심대승 등과 더불어 피를 마시며 주먹을 불끈 쥐고 국치 씻기를 맹세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귀향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안빈낙도하면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누렸다. 공은 기자전(箕子殿) 참봉 벼슬을 천거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에서 독촌 이길과 관란 허국주, 초정 강언룡, 감정 강우황과 어울리면서 여러 명승지를 서로 다니고 날마다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천수를 마쳤다.

○부어골/부어곡(浮魚谷)

‘부어골’은 오감 서쪽에 있었던 골짜기이다. ‘부어곡(浮魚谷)’이라 하기도 했다. 강물이 흐를 때 고기가 떠올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고기와 관련 있는 지명이라면 ‘붕어(鯉魚)’와 관련지어 ‘붕어가 많았던 골’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은 골짜기가 논이 되었다.

○송전(松田)/솔밭등/송정(松亭)

‘송전’은 오감 동쪽에 여남은 집이 있는 동네이다. 마을 주변에 소나무가 많기 때문에 ‘솔밭등,’ ‘송정(松亭)’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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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림 2022-09-23 22:28:12
지역명에 숨은 옛날이야기가 재미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