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21 (중리 척곡마을)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21 (중리 척곡마을)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2.12.13 18: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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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사진=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사진=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척곡(尺谷)/자고개/자실/안동네

‘척곡(尺谷)’은 의령읍 중리(中里)의 행정마을이며 ‘양지말, 중말, 음지말’ 세 뜸으로 구성되어있다. 남향에 있는 것이 ‘양지말’이고 그 아래가 ‘중말(중간마을)’이고 맨 밑에 있는 뜸이 ‘골안말(음지뜸)이다. 요즘은 모두 ‘척곡’으로 부르지만 토박이들은 ‘안동네’ 혹은 ‘자고개, 자실’로 부른다. 이 동네에서 출가한 분들의 택호가 모두 ‘자실띠기/자실댁’이다. ‘자실’이라는 이름을 좋아하는지 마을 입구 돌비에도 자실을 밝혀 두고 있다.

사진=척곡마을(자실) 돌비
사진=척곡마을(자실) 돌비

척곡(尺谷)마을 유래와 관련된 두 가지 설이 있다. 우선 마을 앞 골짜기 모양이 잣대(길이 재는 도구)처럼 길쭉하여 ‘자실’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마을 뒷산이 벽화산이고 이 산이 굽이돌아 마을 앞으로 나오는 지형이다. 그래서 높은 산줄기가 마을 앞·뒤로 좁게 붙어 있어 양쪽 산먼당에 잣대를 걸칠 수 있어 ‘자고개/자실’로 불렀다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척곡의 지형이 좁고 길어서 ‘자실’이라 했다는 것이다. 즉 ‘자실’의 ‘자’는 길이를 재는 기구를 말하고 ‘실’은 ‘골짜기’의 옛말이므로 ‘척곡(尺谷)’은 ‘자실’이라 부르던 이름의 뜻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다른 이야기가 있다. 자실은 옛날부터 감이 잘 되는 토질이어서 감을 많이 재배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과일 나무가 잘 된다. 군것질 할 것이 많이 생산되었다. 그래서 ‘자실 것(먹을거리)’ 많은 곳이라 해서 ‘자실’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척곡은 운곡과 나란히 있다. 벽화산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시냇물이 두 마을을 가르고 있다. 시냇물은 척곡마을 이장집 옆으로 흐르며 근처에 ‘통새미’라는 샘이 있다. 마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편하게 물을 길어 먹었다.

○덕실 감곳

덕실 일대에 감나무가 많기 때문에 덕실 감곳이란 별칭이 붙었다. 특별히 대봉감이 잘 된다. 마을 사람들이 대봉감을 곶감으로 만들어 지역 특산물로 팔고 있다. 마을을 지나 골짜기 안 깊숙이 들어가면 ‘안골’이 나온다. 옛날 처음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동네 터이다. 그러다 점차 농지가 있는 아래쪽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골짜기 안쪽에 ‘척곡 소류지’가 있다. 소류지 위쪽 도랑에 옆에 ‘약물새미’라는 신비로운 샘이 있다.

○약물새미

한겨울엔 김이 솟고 오뉴월이면 냉천으로 변할 뿐 아니라 수량(水量)도 한결같다. 이 샘물은 속병 다스리는 데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여름철 땀띠가 나 고생하면 이 샘물에 목욕하면 바로 낫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여름철에 찬 물을 길어다 오이 냉국이나 시원한 요리에 사용했다고 한다. 샘 조금 위에 규모가 큰 절터가 있었다. 벽화산 줄기가 길게 늘어져 있어 고개가 많다.

○산꼬/산고개

벽화산성이 있는 곳을 올라가는 고개를 ‘산고개’ 혹은 산꼬라 부른다. 이 고개는 하리 수암 마을로 통한다. 그리고 ‘절매재/질매재’가 있는데,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하여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인 길마/질매와 비슷한 지형(地形)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산꼬 밑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름이 ‘느러더미’이다. 병풍처럼 죽 늘어서 있는 덤(바위)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느러’는 ‘넓다’라는 뜻이고 ‘더미’는 ‘큰 바위’나 ‘벼랑’을 가리킨다.

○금굴

벽화산성 올라가는 산꼬에 일제 강점기 금을 캐던 금굴이 여러 개 있다. 지금은 함몰되거나 물이 차 그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다. 마을 사람들이 금 캐는 광산에 부역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사람들이 벽화산 주변에서 금을 집중적으로 채굴하여 주변 산에 금굴이 많이 남아있다. 일제 착취의 흔적이 우리 땅 곳곳에 남아있다.

○뒷모

‘뒷모’는 척곡마을 뒤에 있는 벽화산 어귀를 가리키며 제씨 종산이 있다. ‘모’는 ‘산’을 가리키는 말인 ‘뫼’나 ‘미’의 변형(變形)으로 볼 수 있다. 뒷모 산등성에 고분이 있었다. 도굴되어 유물은 없으나 지금도 땅을 파면 도자기 파편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아이 무덤인 애장터가 있던 곳이다. 고려장(高麗葬)을 했던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고래장터/고려장터’라 한다. 척곡 마을은 칠원 제씨 집성촌이다. 마을 입구에 칠원 제씨 충신 세 분을 기리는 사당 삼충각(三忠閣)이 있다.

○삼충각(三忠閣)

사진=운곡마을 입구에 있는 삼충각
사진=운곡마을 입구에 있는 삼충각

칠원 제씨 세 분의 충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그 중 제경욱(諸景彧)은 무과에 급제하여 해서우후(海西虞候)가 되었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이해우(李海愚) 병사 200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현인복(玄仁福)과 더불어 선봉이 되어 정주성 남문을 포격하고 큰 도끼를 들고 성문을 찍어 성문이 거의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반군의 필사적 반격으로 관군이 패하여 달아나게 되었다. 다시 선봉으로 남문에 육박하였을 때, 반군의 일제사격으로 그만 전사했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제말(諸沫)장군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웅천(熊川)·김해·정암(鼎巖)에서 대승하였다. 곽재우(郭再祐)장군과 함께 조정에 알려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그 뒤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조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다.

제홍록(諸弘祿)장군은 1581년(선조 14) 무과에 급제, 수문장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성에서 숙부 말(沫)을 따라 의거, 김해·웅천(熊川)·정암(鼎巖) 등지에서 용감하게 싸워, 명성이 이순신(李舜臣)장군에게 알려져 그 막하가 되었고, 벼슬이 훈련부정에 이르렀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진중에서 전공을 크게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포위된 진주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출전 중 불시에 적을 만나 적장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정조 때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제사지낼 정각을 세웠다. 제경욱(諸景彧)장군, 제말(諸沫)장군, 제홍록(諸弘祿) 장군 이 세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자 왕명으로 세운 정려가 삼충각이다. 삼충각 옆에는 ‘효열부경주김씨기행비’가 있다.

○효열부경주김씨기행비(孝烈婦慶州金氏紀行碑: 제문식의 부인)

사진= 운곡마을 입구에 있는 삼충각
사진= 운곡마을 입구에 있는 삼충각

김씨의 관향은 경주이고 제문식의 부인이다. 문식은 충장공 말의 11세손이요 치광의 아들이다. 김씨는 제씨 집안에 시집와서 시부모를 정성으로 받들고 가정을 잘 관리해 고을이 칭찬했다. 남편이 일찍 죽자 남편 초상을 치르고 목매 죽으려 시도했으나 집안사람들이 발견하여 응급 치료로 회생했다. 시부모의 만류로 마음을 돌려 먹고 자녀와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셨다. 특히 시부모 초상에 예로써 3년 상을 치르니 도내 유림이 그 효행과 열행을 기록하기를 추천하고 그 아들이 비를 세웠다.

마을 안 골짜기는 자를 걸 수 있을 정도로 좁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조상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정보화 시범 마을, 대봉 곶감 마을로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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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림 2022-12-14 12:03:49
의령 곳곳의 이름유래를 알 수 있어서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