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4)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4)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2.08.2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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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령향토문화연구소 김진수
사진=의령향토문화연구소 김진수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과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의령읍 대산리(大山里)

‘대산리(大山里)’는 의령읍의 법정 동리(洞里)이다. ‘압곡(鴨谷), 대산(大山), 오감(吾甘)’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토박이들은 ‘한지골’이라 부른다. ‘한지골’의 ‘한’은 ‘크다, 넓다, 높다’의 뜻이고 ‘지’는 ‘깊다/집다’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허백영 원장은 “비교적 큰 골짜기이면서 깊숙이 있다 해서 한(크다, 넓다의 뜻)과 짚다(깊다의 토박이말)의 복합어인데 받침소리가 탈락되면서 한지골로 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유지명 ‘한지골’이 한자지명 대산리(大山里)로 바뀐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지’의 어원을 ‘깁다’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해석으로 생각한다.

○ 대산마을

사진=효열각(孝烈閣)모습
사진=효열각(孝烈閣)모습

원래는 화양면 중촌마을이었으나 1935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의령면에 편입된 곳이다. 앞으로 남강 변에 넓은 들이 있고 뒤로는 구룡산이 버티고 있어 전체적으로 아늑하고 앞쪽으로 확 트여 전망이 좋은 곳이다. 옛날에는 남강물이 범람하여 마을 앞은 늪지대였으나 진양호가 만들어지면서 제방을 쌓고 늪지를 농경지로 만들었다. 마을 들어가는 길가에 ‘가가홀스 승마체험장’과 골프연습장이 있다. 새로 들어서는 건물을 보면 농촌 마을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나지막한 언덕을 넘으면 대산 마을이 나오고 마을 입구에 아담하게 잘 지은 효열각(孝烈閣)이 있다. 이것이 바로 효열부유인창원황씨행적비각(孝烈婦儒人昌原黃氏行蹟碑閣)이다. 비각 안에는 벽산김해허공태진송덕비(碧山金海許公泰鎭頌德碑)와 수산 허태조송덕비(水山許泰助頌德碑)가 왼쪽, 오른쪽에 있다.

○효열부유인창원황씨행적비(孝烈婦儒人昌原黃氏行蹟碑)

창원황씨는 김해 허씨 종노의 아내이다. 남편이 병으로 약하여 혼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부인이 남편의 옷 갈아입는 것에서부터 머리 빗질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이런 어려운 형편에도 그녀는 시부모 봉양을 성심성의껏 했다.

부모에게 받은 재산이 없고, 남편 또한 일을 할 수 없어 부인이 손톱이 닳게 일하여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병약한 남편을 업고 효험 있다는 산골짜기(성지골)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함께 정성을 다하여 기도드려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차남을 임신했을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어 큰집 동서도 세상을 떠나게 되어 집안의 봉제사 일체를 부인이 도맡아 했다. 이러한 부인의 행적을 기리고자 대산리 허씨 문중에서 1972년에 행적비를 세웠다.

효열각 앞 도로 맞은편에는 전통정김녕김공용헌송덕비(前通政金寧金公溶憲頌德碑)가 있다. 주변에 담을 쳐서 보호하고 있으나 비석은 풍화되어 가고 있어 안타깝다. 그리고 효열각 뒤의 낮은 언덕이 ‘뒷얍당’이다.

○둥기얍당

사진=대산마을 전경
사진=대산마을 전경

얍당이란 표현이 재미있고 입에 착 감기는 맛이 있는데 이것은 ‘나지막한 산을 지칭하는 토박이말이다.’(허백영). 그래서 효열각 뒤 언덕을 ‘뒷얍당’이라하고 그 뒤에 있는 것이 ‘둥기얍당’이다. 이는 둥기산의 모양이 나지막하고 정상부분이 둥글고 펑퍼짐하기 때문에 ‘둥기얍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산도고개

대산 마을 사람들은 고개 너머 덕실로 자주 왕래 했다. 뒷산 고개를 넘으면 덕실 ‘산다’ 마을로 이어진다. ‘산다’ 마을로 통하는 고개라 해서 이름이 ‘산도고개’이다. 산다로 통하는 고개가 약간의 발음 변이를 거쳐 ‘산도고개’가 된 것이다. 옛날 대산마을 학생들은 산도고개를 넘어 안산다 마을, 산다 마을, 신기마을을 거쳐 벽화초등학교에 다녔다. 산도고개를 넘고 다른 마을을 지나 어렵게 학교 다닌 것이 이제는 마을 어르신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산도고개에서 길게 뻗어 나온 능선이 ‘진등’이고 왼편 골짜기가 성지골이고 오른편이 대밭골 절터골이다.

○강정(江亭)나루

대산리는 남강변에 위치하여 나루가 두 개 있었다. 대산마을 앞에 있는 것이 ‘강정나루/강정나리’이고 오감마을 앞에 있는 것이 ‘수원정나루’였다. 강정나루는 함안 월촌 와룡정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대산마을사람들은 강정나루를 건너 군북장을 다니기도 했다.

○경모재(敬慕齋)

사진=경모재(敬慕齋) 모습
사진=경모재(敬慕齋) 모습

처사 허경탁(許擎卓)을 모시는 재실로 1959년에 지은 것이다. 공은 예촌공 허원보(許元輔)의 후손으로 가례에서 살다 대산으로 이주했다. 포산 곽종천(郭鍾千)이 지은 기문에 공은“예와 공경을 다하여 조상을 받들었으며 자제들을 가르치되 효도와 우애를 근본으로 삼고 명예나 이익을 좇지 말라고 했다. 몸가짐이 맑고 욕심이 없어 남과 다투지 아니하고 하는 바 모든 일이 인륜에 떳떳함이 있었다.”고 묘사했다. 공의 가르침이 후대에 이어져 후손 중에서 이웃사랑을 베푼 이가 특별히 많은 것 같다.

○화계처사 김해허공종범송덕비(華溪處士金海許公宗範頌德碑)

비석의 높이는 2m로 큰 편이다. 공에 이어 그의 아들의 적덕비가 세워졌으니 공의 가문의 가풍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쉽게도 앞·뒷면의 글자는 풍화가 심하여 탁본을 해야 판독이 가능할 것 같다.

○남호거사김해허공진도적덕지비(南湖居士金海許公進道積德之碑)

공은 화계공(華溪公) 종범(宗範)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총명하며 남다른 재질이 있었다. 특별히 가훈을 이어 받아 항상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이웃의 극빈자 81호의 세금과 각종 잡부금을 힘을 다하여 스스로 짊어지고 도와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 계(契)를 모아 마을 입구에 송덕비를 세워 기념했다.

대산마을의 특징은 곳곳에 송덕비, 적덕비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김해 허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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