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9(하리 서남마을)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9(하리 서남마을)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2.11.1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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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의령읍 하리(下里) 서남(徐南)마을

‘하리(下里)’는 의령읍의 법정(法定) 동리(洞里)이며 ‘서남(徐南), 수암(水岩), 성남(省南)’행정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옛 의령군 덕곡면 지역으로 덕곡의 아래쪽이 되므로 ‘하동(下洞)’이라 하였다. 1914년 ‘수암동(水岩洞), 하동(下洞), 비성동(飛省洞)’ 일부를 병합하여 풍덕면(豊德面)에 편입하였다가 1922년 풍덕면이 의령면이 됨에 따라 의령군 하동(下洞)이 되었다. 현재는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뜻의 ‘하리(下里)’로 쓴다.

□하리 서남(徐南) 마을

‘서남(徐南)’은 의령읍 하리(下里)의 행정마을이다. 의령군청에서 서남(西南)쪽에 있는 마을이긴 하지만 이와는 관련 없는 이름이다. 서촌(徐村)과 남촌(南村)을 아우르는 이름인데 마을에 서씨와 남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즉 마을 아래쪽엔 달성서씨가 살고 마을 위쪽엔 의령 남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을 정할 때 마을에 살기 시작한 연대와 살고 있는 인구에 따라 ‘서남마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서촌/서씨땀

서촌 혹은 서씨땀이라고 하기도 한다. 신작로에서 다리를 건너 서남마을에 들어서면 바로 서씨 집성촌이다. 마을 건너편에 산성산이라 부르는 벽화산성이 있는 산이 높이 솟아 있다. 마을 아래쪽에 있는 지역을 ‘문삼골’이라 한다. 그곳에 비교적 넓직한 농토가 있다.

○진산재(津山齋)

사진 =감이 익어가는 진산재 모습
사진 =감이 익어가는 진산재 모습

서남 마을 회관 뒤편에 달성서씨 재실인 진산재(津山齋)가 있다. 재실 관리가 잘 되어 있고 재실 문이 열려 있어 출입이 가능하다. 재실 이름을 진산재(津山齋)라 한 것은 중시조의 무덤이 고개 넘어 만천리 진영산(津永山)에 있기 때문이다. 보통 묘소 아래 재실을 두는 것이 관례이나 1969년 종회에서 산소아래 건립하기 보다 서씨 집성촌에 건립하는 것이 관리에 편하다는 이유로 서남마을에 세웠다. 재실이름을 조상의 산소가 있는 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은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부엉덤/부엉이덤

문삼골 아래 남산천을 면하여 절벽이 있다. 절벽에는 자연 동굴이 있는데 이 굴에 부엉이가 둥지를 틀고 살았기 때문에 부엉덤/부엉이덤으로 불렸다. ‘덤’은 ‘큰 바위’나 ‘벼랑’을 가리키는 옛 지역어다. 서씨땀 앞 냇가에는 약 500년 이상 된 이팝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팝나무의 수난

이 이팝나무는 6월 전후 하얀 꽃을 피워 멀리 들에서 보면 마치 하얀 쌀밥을 한 그릇 고봉으로 담아 놓은 듯이 보인다. 옛날에 쌀밥을 ‘이밥’이라 해서 ‘이밥나무’라 하다 ‘이팝나무’로 부르게 된 것이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하얀 꽃을 보면 저것이 쌀밥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보이는 것은 모두 먹을 것으로 상상했다. 이 나무는 일제 강점기 나무공출이 한창일 때 베어져 실려 갔다. 다행히 그루트기에서 나무가 자라 70년 묵은 고목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래서 고 허백영 원장님이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것을 행정당국에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태풍에 이팝나무가 떠내려갔다. 2006년 하천 정비사업을 하면서 주변을 정리하여 이제는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아쉬움이 더욱 크다.

◇남촌/남씨뜸

남촌 혹은 남씨땀 이라고도 한다. 마을 위쪽에 있다. 서남마을 앞으로는 큰 도랑이 흐르는데 특이하게 남서쪽에서 흘러와 북쪽으로 흘러나가는 역류(逆流)하는 모양이다. ≪의춘지宜春誌≫<의령면>에 “하리(下里)는 옛날 덕곡(德谷)이다. 그 마을은 잠천마을이라 불리고 남씨의 세장(世庄)이다. 달성 서씨도 산다. (下里 古德谷 其洞曰 蘸川南氏世庄 又徐氏達城所居)”라고 나와 있다. 이 문헌에 나오는 ‘잠촌’마을이 바로 남씨 집성촌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에 의하면 마을 앞에 흐르는 도랑도 ‘잠천(蘸川)’ 혹은 ‘잠내’라 불렀다 한다.

○매봉산

남씨땀 바로 뒤에 매봉산이 솟아있다. ‘매봉산’은 의령 남쪽에 있는 구룡산에서 흘러나온 산이다. ‘매봉산’의 ‘매’는 ‘산(山)’을 가리키는 ‘뫼’에서 왔다. 여기에 뜻을 분명히 하려 봉우리를 나타내는 ‘봉(峰)’을 붙여 매봉이라 했다. 매봉에 다시 산(山)을 겹쳐 써 ‘산(山)’의 의미를 가진 세 낱말이 결합된 단어이다. 매봉산 허리에 ‘마내재’가 있다. 이 고개는 남강 변에 있는 만상, 만하 마을로 통하는 길이지만 이제는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버려졌다. 마내재 오르기 전 산코숭이에 큰 대밭이 있다. 6.25전쟁 당시 비행기 폭격을 피하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대밭에 굴을 파고 피신했다고 한다.

 

사진=제산재 모습
사진=제산재 모습

○제산재(薺山齋)

마내재가는 길에 의령남씨 재실인 제산재(薺山齋)가 있다. 제산재는 ‘비온 뒤의 맑은 산천의 기상’을 비유한 것이다. 후손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맑은 기상을 가지기를 기원하며 재실 이름을 지은 것이다.

 

 

사진 =포구나무와 깻돌 모습
사진 =포구나무와 깻돌 모습

○포구나무

동네 가운데 큰 포구나무 고목이 있다. 너무 오래되어 속이 썩어 비었으나 관리를 잘 하여 아직 살아 있다. 포구나무 아래에 동그란 돌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깻돌(들돌)이다. 마을 청년들이 깻돌을 들며 힘자랑을 하곤 했다. 이제는 잊혀진 민속놀이이다.

○치장골(鴙藏谷)

‘치장골(鴙藏谷)’은 남씨뜸 위쪽 매봉산 자락 안으로 쑥 들어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토박이들은 ‘지장골(기장골)’이라 하기도 한다. 지역어로는 ‘잔지리’라고 하는 기장을 재배하던 밭이 많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잔지리는 잡곡의 일종으로 크기가 작고 생긴 모양은 ‘조’와 같으며 기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한자로 ‘치장골(鴙藏谷)’을 표기할 때는 ‘꿩이 숨는 곳’이란 뜻이 있는 ‘치장(鴙藏)’으로 표기 했다. 마을 어르신은 풍수지리 꿩설에 의하여 ‘지장골’이 꿩이 숨은 지형으로 명당길지라고 한다. 그래서 치장골(鴙藏谷)로 부른다고 한다.

사진=신성마을 표지석
사진=신성마을 표지석

◇산성마을/성밑 말

산성마을은 서남마을에서 나와 신작로 건너 산성산(벽화산성) 아래 마을이다. 그래서 ‘성밑 말’이라 부르기도 한다. 6.25전쟁 당시 산성 마을에 인민군 사령부가 있었다. 인민군이 타고 다니던 말과 짐을 나르던 당나귀가 길가와 민가에 가득했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는 일제 강점기에 판 금광이 많이 있었다. 이 금광에 6.25전쟁 당시 의령읍민들이 피난하기도 했다. 이제는 귀촌한 사람들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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