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0)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0)
  •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사
  • 승인 2022.06.24 15:4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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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 땅 이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상을 보는 방법, 독특한 자연환경, 고유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땅 이름은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산을 지키고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의령문화원에서 펴낸 우리고장 땅 이름, 宜寧地名, 의춘지, 의령군지 참고했다.

사진=김진수 의령향토문화사
사진=김진수 의령향토문화사

 

□정암리(鼎巖里)

"宜春誌" '宜寧面 屬里'에 정암리에 관한 기록이 있다. 정암은 의령의 관문이자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들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鼎巖里地沃衍大江山南鄕要渡古郭忠翼金忠勇留陣處宣祖敎書曰揚兵鼎津則遁賊椃魄 洪奭周銘曰 嘗兵于鼎江水殷紅 多先儒題詠 江上巖壁下 又有趙宋諫議大夫 余善才 祭壇碑 公忤旨東來 賜土本縣因爲姓貫 而墓失設壇 居民全務農商

정암리는 토지가 비옥하며 큰 강과 산이 있어 남쪽 고을의 요지이다. 옛날에 곽충익(郭忠翼:곽재우), 김충용(金忠勇:김덕령) 장군이 진을 쳤던 곳이다. 선조 교서에 이르기를 정진鼎津에서 군사가 일어나니 적이 달아났다. 홍석주洪奭周의 명문銘文에는 일찍이 정암 강물의 병사들이 붉었다고 했다. 선비와 유생이 시를 짓고 읊은 것이 많다. 강 위쪽 암벽 아래에는 송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 여선재(余善才)의 제단비가 있다. 공公이 (왕의 뜻을) 거슬러 우리나라로 올 때 우리 현顯의 토지를 주었다. 이로 인해 의령을 성관(姓貫)으로 삼았다. 묘는 전하지 않고 단을 세웠다. 주민들은 농업과 상업에 종사한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장군 전승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경상좌도를 휩쓸고 한양으로 진격할 때 전국에서 최초로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의병창의를 하고 낙동강과 남강 유역에서 왜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특히 전라도로 들어가려는 일본군 제6부대의 선봉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이끄는 2,000명의 왜군을 정암진에서 물리쳤다.

사진=곽재우장군 전적 기념비
사진=곽재우장군 전적 기념비

이 대첩으로 왜 6군은 전라도로 진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순신 장군의 해군은 배후 병참기지와 육지의 왜적을 걱정하지 않고 해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정암진 승전은 조선이 왜군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특별히 비정규군인 의병이 왜군 정규군을 물리침으로써 왜군을 두려워하던 조선군에게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정암강을 따라 늘어서 있는 언덕에 의병공원이 있고 이 공원에 1958년에 건립된 충익공홍의장군전적기념비(忠翼公紅衣將軍戰蹟紀念碑)가 있다. 이 기념비는 군민 성금으로 전국에서 가장 좋은 돌을 구하여 당시 육군 대령이었던 박종대 씨의 주선으로 대전에서 열차로 운반하여 세웠다.

 

○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3년 선조로부터 형조좌랑 직함과 충용장 군호를 받았다. 그는 곽재우 장군과 함께 견내량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나 육군과 해군의 연합작전인 장문포(거제 장목) 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왜란이 끝나가던 1596년에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이몽학이 민심을 얻기 위해 여러 의병장이 반란에 가담할 것이라는 거짓 선전을 했다. 이 선전 때문에 반란이 평정된 후 김덕령, 홍계남, 곽재우, 고언백 등 많은 의병장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특히 김덕령은 선조가 직접 국문했다. 국문할 때 대신들은 그를 변호하기보다 오히려 죽이려 하였다. 선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조가] 대질하여 심문하고는 오히려 그(김덕령)를 아깝게 여겨 좌우에게 묻기를, "이 사람을 살려줄 도리가 없는가?" 하니, 대신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의 일당들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상은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였다. 정언 김택룡(金澤龍)은 아뢰기를,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자 대신들은 의병장들을 견제했다. 한 술 더 떠 전쟁이 끝났으니 장수 하나 쯤 죽인다고 별일 있겠느냐고 대담하게 주장하는 대신도 있었다. 이러니 김덕령은 살아날 방도가 없었다.

그는 계사년(1593)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에 삼년상을 마치지 않고 나와 상복을 벗고 왜적을 토벌하려 여러 해 동안 노력했으나 결국 역모에 몰려 죽게 되었던 것이다. 김덕령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곽재우 장군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전쟁중이였음에도 왕의 7차례 소환에 불응하고 모친의 3년 상을 치른 후에 관직에 나왔던 것이다.

 

○의령여씨 향제시도록(宜寧余氏 享祭時到錄)

의령여씨 향제시도록의 필자는 여중묵(余重默)이다. 현재 있는 것은 필사본이나 그 가치가 인정되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2호로 지정되었으며 의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책의 내용은 비단일록서(碑壇日錄序) 2면과 본문인 비단일록(碑壇日錄) 및 시도기(時到記)가 있다.

비단일록은 필자인 여중묵이 안동을 출발하는 1807년 2월 26일로부터 의령 정암에 비석을 세우는 동년 12월 4일까지 관련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다. 시도기는 1807년 12월 4일 의령 정암루 동쪽 절벽 아래에 ‘의령여씨 시조제단비’를 세우고 처음 제례를 지낸 것부터 1943년 10월 10일 까지 지낸 제례가 기록되어 있다. "향제시도록"은 정암리에 세워져 있는 의령 여씨 시조공의 비석 및 비각이 설치된 경위 및 제향의 시행 등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이다.

 

○유송 간의대부 여공 제단비(有宋諫議大夫余公祭壇碑)

사진 =간의대부 여공 제단비
사진 =간의대부 여공 제단비

정암루 아래 왼쪽으로 돌아 강으로 나가면 절벽아래 의령 여씨의 시조 여선재의 망제단과 신도비각이 있다. 여선재는 중국 송나라 신종 때 벼슬이 간의대부였다. 그는 왕안석의 개혁 신법의 부당함을 직간했으나 신종 황제가 주청을 들어 주지 않자 고려로(1070년) 귀화했다. 고려에서 그를 예우하여 의령현 정암리 땅을 봉토로 내려 의령군으로 봉했으므로 그는 의령 여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그 후 시조 묘소를 찾지 못한 의령 여씨 후손들이 용덕 우무실(우음곡)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모셔 왔다. 그러다 순조 7년(1807)에 묘소 위치를 정암이라고 정하여 정암루 아래 망제단과 신도비각을 세웠다. 글은 대사간을 지낸 김한동(金翰東)이 짓고, 글씨는 이의선(李宜璿)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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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웅 2022-06-25 08:17:24
좋은 자료 정리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암리는 자료가 많아 두 번씩이나 올리게 되네요

무전리 마당골 이야기도 한 번 더 정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유림 2022-06-24 22:28:19
곽재우 의병장 말고도 다른 의병장들이의 이야기들이 많이 숨어있었네요~ 의령 지역 속의 숨은 이야기들이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