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2)
[독자기고]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2)
  •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사
  • 승인 2022.07.27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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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 땅 이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상을 보는 방법, 독특한 자연환경, 고유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땅 이름은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산을 지키고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의령문화원에서 펴낸 ≪우리고장 땅 이름≫, ≪宜寧의 地名≫,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사진= 의령향토문화연구소 김진수
사진= 의령향토문화연구소 김진수

 

□만천리(萬川里)

만천리(萬川里)는 의령읍에 속한 동리(洞里)이다. ‘만상(萬上), 만하(萬下)’ 두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토박이들은 ‘만내, 마내’ 또는 노촌(盧村)으로 부른다. 만천리에 관한 기록은 ≪의춘지宜春誌≫의 <방리坊里>편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萬川里 邑距十五里 東西南大江 後改華陽面 今仍之

만천리는 읍에서 15리 거리이다. 동·서·남에 큰 강이 있으며 화양면(華陽面)이었던 것을 바꾸어 지금에 이른다.

옛날에는 대산, 만천지역의 이름은 만천면(萬川面)이었다. 그러다 1913년(대정2년) 면·리·동(面里洞) 통폐합하면서 현재 만천리 일대는 화양면(華陽面)에 편입되었다. 1935년 행정 구역 조정으로 인해 노촌(만상), 하촌(만하)을 병합하여 의령면에 편입하였고 일부는 상정면에 편입되면서 화양면은 없어졌다. 이후 상정면은 화정면으로 바뀌었다. 1979년 5월 1일 의령면이 의령읍(宜寧邑)으로 승격됨에 따라 의령읍 만천리가 되었다.

사진='해동지도'에 있는 만천면
사진='해동지도'에 있는 만천면

토박이들은 만천을 ‘만내/마내’라 부르지만 지명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 지역에 조선 중기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노인복(盧仁復)이 임진왜란 직후 현재의 만천리 만상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그는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기에 그가 사는 지역의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만천萬川이란 한자 이름이 먼저 지어지고 ‘만내, 마내’라 불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1750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지도(古地圖)인 <해동지도>에 ‘만천면(萬川面)’이 나타나며, 1872년 조선후기지방지도 의령현지도에 ‘만천리(萬川里)’가 나타난다. 이것을 볼 때 한자이름인 만천(萬川)이 먼저 만들어 지고 이것을 지역민들은 한자 ‘만(萬)’의 음과 ‘내(川)’의 뜻을 합하여 ‘만내’로 하다 발음하기 쉽게 ‘만내/마내’라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만상(萬上)

‘만상(萬上)’은 의령읍 만천리(萬川里)의 행정마을이다. 예전에는 ‘마내 웃말’ 혹은 ‘마내 노촌(盧村)’이라 불렀다. 만천(萬川)의 윗마을이기 때문에 ‘만상(萬上)’이라 불렀다. 이 마을에는 이(李)씨가 먼저 들어와 살았으나 노씨가 들어와 가세가 늘면서 이씨는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이 마을을 ‘노촌(盧村)’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 = 상사바위 모습
사진 = 상사바위 모습

만상마을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남강이 흘러 농지가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동네 뒤편, ‘시인골’, ‘큰골’로 불리는 산골짜기를 개간하여 천수답을 만들었다. 좁은 농토를 가지고 생활하기 힘들어 개간한 산비탈과 마을 앞 농지에 쪽파를 심었다. 만상 쪽파는 생산량이 많고 맛도 좋아 마산 어시장, 부산 구포시장까지 팔려갈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쪽파를 심어 번 돈으로 자녀들을 외지 공부를 시킨 억척스러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

만상 뒷산을 넘어 구룡마을로 통하는 고개에는 큰 절이 있어 이름이 절먼당이다. 그 절에 빈대가 끓어서 스님들이 생활할 수 없어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마을 뒤 매봉재를 넘으면 수월암으로 통하며 큰골을 지나 산고개를 넘으면 덕실 서남촌으로 이어지는 데 이 고개를 박령재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곡식을 지고 박령재를 넘어 덕실 서남촌 방앗간에서 곡식을 찧어 먹었다고 한다. 남강을 굽어보는 만상 뒷산에는 상사바위가 있다.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상사바위의 전설

정암 솥바위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상 뒷산(만천리 산119)에 나병을 앓고 있던 총각이 바위굴에서 살고 있었다. 치료약이 없어 산신령께 기도를 드리며 지내던 어느 날 꿈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이 말하길 자신이 주는 약을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먹으면 병이 낫게 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었다. 약을 먹는 동안 처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총각은 약속했고 그날부터 바위굴 앞에 앵두가 하루에 한 알씩 떨어졌다. 총각은 열심히 먹었고 병도 호전되었다. 몸이 회복되니 총각은 그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처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매일 앵두가 떨어지는 바위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바위절벽을 기어오르다 힘이 빠져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지는 순간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면서 처녀는 남강 가운데로 떨어져 솥바위로 변했고 총각은 그 자리에서 커다란 바위로 변하고 말았다. 이렇게 처녀와 총각은 서로 바라볼 수만 있고 만나지 못하는 바위가 되어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상사바위 근처 바위절벽 위에는 앵두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랑이가 살았던 바위굴이 있으며 상사바위 꼭대기에 돌을 던져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구양재龜陽齋

만상마을 초입에 광주 노씨 입향조이자 구암공파 파조인 부호군 구암(龜庵) 노인복(盧仁復)을 기억하고 제사지내는 집 구양재가 있다. 4월에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재실을 지을 때 응초(鷹樵) 노정훈(盧正勳)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재실 뒤편에는 제사지낼 때 몸을 정결하게 씻는 데 사용하는 맑은 샘이 있다.

 

○ 응산정鷹山亭

사진 =구양재, 응산정 모습
사진 =구양재, 응산정 모습

응산정은 구양재 바로 옆에 나란히 있다. 이 재실은 응초(鷹樵) 노정훈(盧正勳: 1853. 9. 15.-1929. 8. 2.)을 추모하여 자손이 건립한 것이다. 공은 어려서 부터 문장에 능했고 성품이 곧고 착했다. 의령향교(宜寧鄕校) 전교(典校)를 지냈다. 공은 1901년(광무5) 미수(眉叟) 허목(許穆)을 추모하기 위해 대의면 신전리 중촌마을에 있는 이의정(二宜亭)을 지을 때 중심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구양재와 응산정은 마을 초입에 나란히 있고 응산정 옆에는 노대수(盧大受) 제단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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