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3)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3)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2.08.1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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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 땅 이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상을 보는 방법, 독특한 자연환경, 고유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땅 이름은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산을 지키고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의령문화원에서 펴낸 우리고장 땅 이름, 宜寧地名, 의춘지, 의령군지 참고했다.
사진=의령향토문화연구소 김진수
사진=의령향토문화연구소 김진수

 

○만하(萬下)/하촌

‘만하(萬下)’는 의령읍 만천리(萬川里)의 행정마을이다. 지역민들은 만천(萬川)의 ‘아랫마을’ 또는 ‘하촌(下村)’으로 부르기도 한다. 진양하(河)씨들 집성촌이라 하촌(河村)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 이름의 의미가 ‘아래’ 또는 ‘밑’이란 뜻이 있고 또한 진양하씨 집성촌이라는 의미도 있어 마을 주민들은 지명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만하마을 입구에는 회산 황씨(檜山黃氏)가 모여살고 마을 안쪽에는 진양하씨(晋陽河氏)가 모여 산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산이 바로 황산 혹은 황개산이다. 이산의 주인이 황씨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황산 초입에는 황씨 선조 묘가 산등성이를 따라 위에서부터 한 줄로 늘어서 있다.

 

○만하 숲

사진 제공 =허백영, 만하마을 앞들 정자나무.
사진 제공 =(고)허백영 전 의령문화원장, 만하마을 앞들 정자나무.

화정면으로 가는 지방도 바깥쪽 강가에 아름다운 숲이 있었다. 이 숲은 포구나무와 소나무로 구성되어있었다. 숲을 기준으로 강쪽은 숲 밖이라 하고 동네 쪽을 숲안 이라고 했다. 숲은 강에서 마을로 부는 바람을 막고, 남강이 범람하여 물이 마을로 넘어 드는 것을 막고, 외부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남강을 따라 새 도로를 만들면서 숲을 훼손하였고 이제는 아름다운 숲이 완전히 없어졌다. 다행히 숲의 마지막 나무를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사진을 보면 아름다운 포구나무와 불에 타 죽은 고사목이 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고사목은 속이 비어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운치 있는 포구나무는 외지로 팔려나갔고 고사목은 흔적이 없다. 마을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 주니 모두 나무와 얽힌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워했다.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 아담하게 지은 재실이 있다. 이 집이 바로 모원재이다.

 

○모원재(慕源齋)

사진 =모원재
사진 =모원재

이 재실은 증가선대부락천황공휘홍동(贈嘉善大夫樂天黃公諱弘同)공을 기리고 그의 가르침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모원재기에 보면 이 재실을 지은 목적이 “이제 낙천공(樂天公)이 끼친 교훈을 반드시 이어받아서 가정에 전할 자가 있을 것이로다. 청컨대 서로 솔선해서 강론하여 밝혀 사람마다 그의 뜻을 떨어트림 없게 함이 마땅히 할 일로 삼은즉, 이루는 것도 여기에 있고 지키는 것도 여기에 있어서 이 재실이 장차 영세토록 뛰어날 것임을 어찌 의심하겠나” 낙천공의 학문과 도의가 세세토록 후손에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히 묻어난다.

모원재에서 조금 올라가면 골짜기가 보인다. 이 골짜기가 성지골이다. 성지골에서 위로 올라가면 매봉산(매봉재)/응봉산(鷹峰山)이 있다. 6.25 한국전쟁 당시 만천리 일대는 인민군의 최전방이었다. 그래서 인민군이 남강을 도하하기 위하여 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전세가 불리하자 매봉재를 넘어 도망쳤고 유엔군 전투기가 도망가는 인민군을 이 고개에서 많이 죽였다고 한다.

 

○영사재(永思齋)

사진=영사재
사진=영사재

성지골 초입을 지나 만상마을 쪽으로 올라가다 오른편 산기슭에 오래된 기와집이 보인다. 이 집이 바로 영사재이다. 영사재는 1863년에 건립된 진양하씨 재실이다. 하상규河尙奎를 중심으로 진양하씨 유력자들이 그들의 선조인 하성구(河聖龜) 하성호(河聖浩) 형제분을 기리고자 지은 재실이다. 선조의 높은 학문과 청빈한 삶을 후세에 전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영사재에서 보면 앞쪽에 보이는 언덕이 백사골(백사곡)이다. 백사골 다음에 있는 것이 갓골이다.

‘진이들’은 만하 바깥쪽으로 있는 들이다. ‘지미니들’이라 하기도 한다. ‘진이들’의 유래는 남강가의 들의 길이가 길기 때문에 ‘길다’라는 사투리 ‘질다’에서 나왔다는 추측과 강가 습지라 땅이 질퍽질퍽하기 때문에 땅이 ‘질다’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 들은 매립하였고 그 자리에 한일합섬 공장이 들어서 있다. 이 공장에서 생산한 부직포가 코로나-19를 예방하는 마스크의 주요 재료로 쓰인다니 묘하게 얽힌 인연이라 할 수 있다.

 

○ 서습(徐習)공 묘소

사진=달성서씨 입향조 서습공 묘역
사진=달성서씨 입향조 서습공 묘역

한일합섬 정문 맞은편 굴티재로 올라가는 산등성이 초입에 달성 서씨 입향조인 부사공 서습의 묘소가 있다. 달성 서씨 후손들이 묘역 일대를 잘 조성하고 관리하고 있다.

옛날 굴티재 아래에는 당산나무와 조산이 있어 당산제를 지냈고 고개를 넘어 다니며 조산에 돌을 던지며 소원을 빌기도 했다. 조산 근처는 여우가 자주 출몰하였고, 간혹 앞발로 흙이나 돌을 긁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뿌려 혼비백산하게 하였다. 밤에는 파란 도깨비불이 하늘을 가로지며 날라 다니던 신화와 전설의 땅이었다. 새 도로가 나면서 거짓말 같은 이런 일들이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굴티재 마루에 서면 앞쪽으로 남강과 월촌 들판이 눈길이 가는 끝가지 펼쳐있고 뒤쪽으로는 의령 한들을 시원하게 볼 수 있다.

한일합섬에서 정암 방면에 나지막하며 볼록 솟은 언덕이 뱀 등, 개구리 등이다. 마치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는 형상이라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 도로를 내며 개구리 등을 없애 버렸다. 뱀 등옆 작은 골짜기가 ‘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명당길지로 알려져 있다. 묘를 쓸 때에 꿩이 알을 품고 있듯이 봉분을 높고 크게 할수록 후손이 복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무한정 크게 할 수 없는 이유는 매봉산이 매의 형상이기 때문에 봉분을 너무 크게 하면 꿩이 매에게 발견되어 사냥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봉분의 크기와 높이를 적당히 하 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런 중용의 처세 지혜가 있는 후손이라면 선조 묘를 굳이 명당길지에 모시지 않아도 복을 받을 것이다.

만천리 경계는 현재 곽재우 장군 동상이 서있는 지역까지이다. 의병공원 대부분도 만하마을에 속하는 곳이다. 그래서 현재 의령관문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만하다리’라 해야 정확한 이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 일대가 곽재우 장군 정암진 승전지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정암다리’로 이름 붙인 것이다. 만하 주민들은 잃어버린 ‘만하다리’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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