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8)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8)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2.10.2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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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사진=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사진=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의령읍 하리(下里) 수암(水岩)마을/서안골/상골

‘수암(水岩)’은 의령읍 하리(下里)의 행정마을이다. 의령읍에서 서남쪽 깊은 골짜기 벽화산(碧華山) 바로 아래에 있다. 수암마을은 골이 깊어 6.25한국전쟁 당시 의령읍내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하리에 대한 기록은 ≪의춘지宜春誌≫<의령면>에 다음과 나와 있다.

“하리(下里)는 예전 덕곡(德谷)이다. 동구(洞口)에 덕곡서원이 있고 서쪽에 수암사 옛터와 석탑이 있다./下里 古德谷 洞口有德谷書院 西有水巖寺墟石塔”

동녘만 열린 채 두루 산이 에워싸고 있는 작은 마을인데 토박이들은 보통 ‘서안골’ 혹은 ‘상골’이라 부른다. 수암(水岩)마을 유래에 관한 설은 다양하다.

첫째는 물과 바위(바구)가 유명한 골이기 때문에 ‘수암(水岩)’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벽화산의 벽화산성(碧華山城) 아래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성내(城內)>성안>서안(사안)>상골’ 순서의 음운 변화를 겪으면서 차례로 변화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사진=서암마을 전경
사진=서암마을 모습

둘째는 옛 문헌인 <조선지지자료>에 ‘수암촌(水岩村)’이 기록되어 있고, ≪宜春誌≫ <불우(佛宇)>편에 보면 “수암사는 벽화산에 있는데 지금은 없다.(水巖寺 在碧華山 今無 )”라고 적혀있다. 이러한 자료로 보아 ‘서안골, 상골’이라는 토박이말은 ‘수암’이라는 한자 지명에서 변화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의령사람들은 ‘물 좋은 서안골’, 혹은 ‘바구 많은 사앙골’ 같은 말을 많이 했다. 벽화산(碧華山) 아래 깊은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고 바위 또한 단단하고 모양이 예쁘니 이런 속담이 생겼던 것이다. 이런 자연환경에 지은 절의 이름을 ‘수암사(水巖寺)’라 했던 것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수암사’가 있는 마을이니 ‘수암’마을이라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수암 마을에 있었던 수암사지(水巖寺址)의 위치는 지금 알 수 없는 형편이라 아쉽다. 다행히 보천사지는 삼층석탑과 승탑이 남아있어 절의 위치를 알 수 있다.

 

○ 보천사지 삼층석탑(寶泉寺址三層石塔) (보물, 1963.01.21 지정)

사진=보천사지 삼층석탑
사진=보천사지 삼층석탑

보천사 옛터에 세워진 고려 전기의 탑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천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사찰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 절에 빈대가 많아 살기 힘들어지자 승려들이 다른 절로 떠나게 되었고 곧바로 폐사되었다고 한다. 보천사 들어가는 들머리를 ‘탑거리’라 부른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얹었는데, 고려탑이긴 하나 신라의 일반적인 양식을 이어받고 있다. 탑의 바닥돌은 아래에 네 모서리마다 큰 괴임돌을 두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양 모서리와 가운데 부분에 기둥 모양을 하나씩 새겼다.

탑신은 각 층에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여, 층층이 온화하게 크기를 줄이면서 올려놓았다. 몸돌에는 모서리에만 뚜렷하게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5단의 밑받침을 두었다. 지붕돌의 경사면은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며, 처마의 윗선은 거의 수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서 서서히 들려있다.

전체적으로 원만한 비례를 나타내며, 기단부에서의 독특한 구성이 돋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1967년 사리유물을 도난당하는 바람에 탑이 쓰러져 많이 부서졌으나 곧 보수하였다. 이때 사리를 장치하였던 흔적이 밝혀졌는데 그 안에서 청동으로 만든 불상과 광배 모양의 구리조각, 흙으로 만든 탑 등이 발견되었다.[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의령 보천사지 승탑 (宜寧 寶泉寺址 僧塔) (보물, 1968.12.19.지정)

사진=보천사지 승탑
사진=보천사지 승탑

보천사지 삼층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높이 3.35m로 아담하다.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을 따르고 있다. 4각의 바닥돌은 제법 넓은 편인데, 윗부분에는 단면이 8각인 1단의 굄이 새겨져 있다. 높직한 아래받침돌은 가운데부분의 8각 덮개돌 모양을 중심으로 윗부분과 아래부분으로 구분된다. 아래부분에는 8각의 각 면마다 안상(眼象)이 1구씩 조각되었고, 윗부분에는 8각의 전면에 구름무늬를 가득 새겼다. 아래받침돌의 윗면에는 각지고 둥근 3단의 테두리 장식을 두어 가운데받침돌을 받치게 하였다. 가운데받침돌도 단면이 8각으로, 아래부분에는 테를 둘렀고,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함께 안상이 조각되어있다.

윗받침돌에는 2단 받침 위의 각 면마다 여러 장의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 16개가 돋을새김되었고, 맨 윗면에는 역시 각지고 둥근 3단의 몸돌 굄이 마련되어 있다.8각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이 새겨졌는데, 앞면에만 문비(門扉)와 함께 자물쇠 모양이 돋을새김 되었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이 승탑은 세부 조각이 매우 간략하지만 품위가 있어 보인다. 안상을 많이 새겼고, 아래받침돌의 구름 무늬가 약간 형식화되었으며, 지붕돌이 두꺼운 편이어서, 고려시대의 조각 수법을 잘 반영하였다고 평가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마을 뒤로는 높은 고개가 있다. 하나는 화정면 석천마을로 통하기 때문에 ‘석천재’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가례 대천(한내)마을로 통하기 때문에 ‘한내재’라고 한다. 석천재 가기 전에 ‘옹구굴산’이 있다. 마을 입구에 있던 옹기 만드는 곳에 쓸 땔감을 공급하던 산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옹구골/옹구땀

수암마을에는 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옹구골’이라 불렀다. 이 옹기가마는 광복 이후까지도 전통 옹기를 구워냈다. ‘옹구골’은 ‘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장개터/장재터

‘장개터’는 석천재 옆에 있는 넓은 분지이다. ‘장개’의 유래는 ‘길고 넓은 곳’의 뜻으로 만든 한자어 ‘장개(長開)’로 본다. 지형(地形)이 목장으로 쓰일 만큼 널찍한 곳이기 때문에 ‘장개(長開)’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는 것이 일리가 있다.

장개터는 명당자리로 소문이 나서 탐내는 사람이 많았지만 묘는 절대 쓰지 못하게 막고 있다. 이곳에는 말발자국처럼 움푹 패인 바위 덤이 있는데 이것은 말발자죽바구(말발자국바위)로 불린다. 또 천연 약수가 솟는 ‘산지등’이라 불리는 올달샘이 있다. 이 샘은 효험이 있는 신비의 샘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이 샘에 와 치성을 드리곤 했다.

처녀바위(처지바위)’ 혹은 ‘쌍바위(쌍바구)’라 불리는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맑은 날 해그름에 선녀 둘이 내려와 골짜기에서 목욕을 한 뒤 이 바위에서 머리를 빗어 말렸고 단장을 마치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마을 처녀들이 장재골에서 목욕을 하고 이 ‘쌍바위’에서 머리를 빗어 말리면 얼굴이 고와지고 머릿결도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다.

지금은 장개터에 태양광 발전소가 들어서고 캠핑장을 건설하고 있다. 개발로 인하여 지형이 바뀌고 주변 숲이 우거져 전설이 깃든 바위와 샘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대밭등

‘대밭등’은 수암마을 위쪽에 있는 산이다. 수암마을은 원래 이 대밭등에 주민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논농사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차츰 대밭등 아래로 내려와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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