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宜寧)의 땅 이름 유래(地名由來)와 역사이야기(2)
의령(宜寧)의 땅 이름 유래(地名由來)와 역사이야기(2)
  •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사
  • 승인 2022.02.09 15:01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에게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 땅 이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상을 보는 방법, 독특한 자연환경, 고유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땅 이름은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산을 지키고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의령문화원에서 펴낸 ≪우리고장 땅 이름≫, ≪宜寧의 地名≫,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의령(宜寧)의 땅 이름 유래(地名由來)와 역사이야기는 지난 1월 27일 본지 게재에 이어 두번째 편으로 계속된다.

사진=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사진=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 동동리(東洞里)

‘동동리(東洞里)’는 의령읍의 법정(法定) 동리(洞里)이다. 의령읍내 동쪽에 있어 보통 동동(東洞)이라 하는데 동동본부락, 소입(바들), 가야(개애골), 남산(배껏장터), 구룡(구싯골) 다섯 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예전에는 의령읍성의 동문이 있어 동문외동(東門外洞)이라 부르기도 했다.

 

○ 소입(所入)/바들/바드리/바들례

옛날지도에도 ‘소입(所入)’이란 한자지명이 나온다. 마을이 형성된 초기에 한자지명이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유지명으로 ‘바들, 바드리, 바들례’라 부르기도 한다. 한자지명 ‘소입(所入)’이 쓰인 것은 이 지역이 읍성 동문근처이고 의령향교가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동문이 있고 의령향교가 있어 출입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소입(所入)’이란 지명을 풀어보면 현(縣)의 관아(官衙)나 향교 등을 ‘소(所)’라 하고 ‘들어가다’나 ‘출입’의 뜻으로 입(入)을 써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의미로 ‘소입(所入)’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많다.

관아 출입을 하거나 향교출입을 하는 사람들은 ‘소입(所入)’이라 불렀지만 지역민들은 한자이름 대신에 고유지명인 ‘바들, 바드리, 바들례’라 불렀다. 이 지명은 고유지명을 한자지명으로 바꿨던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한자지명을 바탕으로 고유지명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즉 ‘소(所)’의 훈(訓)에서 ‘바’를 따고 ‘입(入)’의 훈(訓)에서 ‘들’을 따서 조합하여 발음하기 편하게 ‘바들, 바드리, 바들례’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밭 언덕 지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밭들’이라 했던 말이 받침소리 생략으로 ‘바들’ 혹은 ‘바드리’로 변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이 지역은 의령읍 북산 줄기가 끝나는 지점(산코숭이)이라 언덕배기에 밭이 많았다. 그리고 ‘바들’은 언덕머리를 뜻하는 토박이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받들’에서 ‘바들’이란 지명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소입(바들)에는 1618년 이전에 의령향교가 있었다. 정확한 향교자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의령군지》의 학교(學校)편에 보면 “옛날 동성밖에(소입)에 향교가 있었다. 만력 사십육년(1618)에 현감 이함(李涵)이 현재 위치인 서동으로 옮겼다. 향교에는 도유사(都有司) 1명, 장의(掌儀) 2명, 교생(校生) 2명, 전곡(典穀) 1명, 노비 59명이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도유사(都有司)’는 향교의 사무를 관장하는 우두머리로 현재의 교장에 해당한다. 이 명칭은 현재 ‘전교(典校)’로 바뀌었다. ‘장의(掌儀)’는 도유사 아래의 직책으로 요즘의 ‘교감’정도 된다. 담당 재실에 따라 ‘동재장의·서재장의’, 서열에 따라 ‘수장의·부장의’ 등으로 불렸다. 교생(校生)은 향교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지칭하는 말이나 학생을 관리하는 하는 이도 역시 ‘교생(校生)’이라 했다. ‘전곡(典穀)’은 노비와 향교전(鄕校田)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다.

과거 의령향교가 있었던 지역 주변에 현재 남산초등학교, 의령중학교, 의령고등학교 등 교육기관이 밀집해 있으니 과거나 현재나 소입지역은 의령교육 일번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허백영 원장에 의하면 소입에는“모든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大小人員皆下馬)라는 글자가 적힌 하마비가 있었다 한다. 그리고 의령읍 동·서·남 세 곳에 하마비가 있었지만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조선어학회 운영자금 지원과 조선어큰사전 편찬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남저 이우식 선생의 생가터(현 천주교 성당자리)가 있다.

 

○ 가야(佳也)/개애골

‘가야’는 의령읍 동동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가야’의 의미는 ‘가야(佳也)’의 한자 뜻과는 관련이 없다. 과거에 쓰이던 ‘가야’라는 고유지명을 한자로 바꿔 적은 것으로 추정한다. 즉 고유지명의 음에 해당하는 적당한 한자를 빌려 지명을 쓴 것이다. 한자어 중에 ‘아름답다, 미려하다’의 의미를 가지는 ‘가(佳)’자를 선택한 것이 재미있다.

실제로 ‘가야’의 의미는 ‘기와’와 관련된 것이란 설이 설득력이 있다. 가야마을 뒤쪽은 북산 줄기가 길게 뻗어 있는데 예전에 산자락 밭 언덕에 기와를 굽는 기와 굴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기와 굴을 지역어로 ‘재애굴’ 혹은 ‘재와굴’이라 불렀다. ‘재애굴’ 혹은 ‘재와굴’로 불리던 것이 음운변화를 겪으며 축약되어 ‘가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에는 밀양 박씨 재실인 신라정(新羅亭)이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강혜지 2022-02-10 19:58:01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잊혀져 가는 우리의 뒤안길을 발굴하는 글 유익하고 앞으로 더 기대 됩니다

이영준 2022-02-09 16:39:29
지역 이름의 유래를 아니까 새롭게 보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