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1)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1)
  •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사
  • 승인 2022.07.13 15: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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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 땅 이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상을 보는 방법, 독특한 자연환경, 고유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땅 이름은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산을 지키고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의령문화원에서 펴낸 ≪우리고장 땅 이름≫, ≪宜寧의 地名≫,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사진= 의령향토사연구소 김진수
사진= 의령향토사연구소 김진수

□백야(白也)/정암배기

‘백야(白也)’는 의령읍 정암리(鼎巖里)의 행정마을이다. 백야 토백이들은 ‘정암배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자 이름은 흰(白), 어조사(也)로 그 의미는 “희도다, 희구나”정도이다. 한자 의미에서 마을 유래를 추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백야(白也)마을 의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이 많다.

많은 추측 중의 하나는 1592년 왜란이 일어났을 때 곽재우장군을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정암진에 진을 치고 왜병과 전투를 할 때에 큰 바가지로 탈을 만들어서 허수아비에 씌우고 밤이 되면 강변 요지에다 세워 의병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여 왜군을 속였다고 한다. 이 전술을 펼치는데 필요한 박을 조달하기 위하여 골짜기 안쪽 산자락 밭에 박을 많이 심었다고 한다. 보름날 밤에 아래에서 올려 보면 하얀 박이 골짜기에 가득하여 박이골, 박골로 부르다가 뒷날 한자로 ‘백야(白也)’로 정했다고 한다.

또한 백야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정암진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군바위(장구더미)의 전설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장군바위 모습
사진=장군바위 모습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 선조(宣祖) 임금 때 백야마을에 하늘에서 홀연히 한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 내려와 좁쌀 한말을 지고 바위중간에 있는 돌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누구든지 내가 이곳에 내려와 바위에 들어간 사실을 세상에는 알리지 말라고 당부 하였다. 그런데 장군의 모습을 본 어떤 여인이 그만 저것 보라고 손가락질을 하자 장군은 돌문을 닫아버리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해가 지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정암진을 공격하였다. 이 때 홍의장군을 비롯한 의병이 막아 싸웠으나 병사가 부족했다. 이 때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장군이 지고 들어간 좁쌀 한말이 낱낱이 군사가 되어 적병을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은 장군바위 앞으로 구룡마을로 들어가는 도로가 나고 주변을 매립하여 우람했던 수직절벽은 초라한 바위더미로 보인다.

 

○ 군자감정 강우황(姜遇璜)의 묘

사진 =정강재(鼎岡齋) 모습
사진 =정강재(鼎岡齋) 모습

현재 정암 의병공원 자리에 군자감정(軍資監正) 강우황(姜遇璜)의 묘와 그를 향사하는 진양강씨 재실인 정강재(鼎岡齋)가 있었다. 의령관문과 홍의장군기념공원을 만들며 정강재는 정암리 백야마을 입구(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420-7)로 옮기고 묘는 용덕으로 옮겼다. 현재 의병공원 기로계 11현 위촉비 자리가 바로 정강재가 있었던 곳이다.

강우황은 전력부위(展力副尉) 강기룡(姜紀龍) 장군의 아들이자 임진왜란 의병장인 강언룡(姜彦龍)의 조카이다. 공은 충·효의 가문 후손이었다. 공의 부친인 기룡(紀龍)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 창의(倡義)하였다. 계사년(癸巳年:1593) 제2차 진주성(晋州城) 싸움에 참전하여 성을 굳게 지키다가 마침내 촉석루에서 순절했다. 공은 의령고등학교 앞에 있는 7정려 중 4번째 정려의 주인공이다.

부친 기룡 장군이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공은 동생 계황啓璜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아버지의 시신屍身을 동생과 함께 수습하여 진주오실에 반장返葬하고 시묘하다 왜적에게 붙잡혔다. 부산 동래까지 끌려갔으나 가까스로 탈출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그때 공의 나이 15세고 동생의 나이는 10세였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분별력 있게 일을 처리한 것이다. 공은 봉정대부군자감정(奉正大夫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 기로계 11현 유촉비(耆老契 11賢 遺躅碑)

의병공원 옛날 정강재가 있었던 자리에 기로계 11현 유촉비(耆老契 11賢 遺躅碑)가 서있다. 기로계는 회갑을 넘긴 노인들께서 맺은 계라는 뜻이다. 1606년 남강변 의령, 진주, 함안 등지의 문무유현(文武儒賢) 11명이 의(義)로써 결연하고 계를 만들었다. 이들은 봄과 가을에 정암루(鼎巖樓), 관란정(觀瀾亭), 십완정(十翫亭)등 남강변의 정자를 오가며 학문을 논하였고 풍류와 멋을 즐겼다. 계원의 집안에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의미 있는 시를 선사하며 축하했다. 집안에 슬픈 일이 있을 경우에는 직접 참석하거나 혹은 사람을 대어 궂은일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계의 규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로계의 기로계십일현(耆老契十一賢)은, 참봉 조계헌[參奉 曺季憲·후손 세거지 의령군 화정면 상정], 처사 이길[處士 李佶·후손 세거지 함안군 가야읍 검안], 진사 현필남[進士 玄弼南], 습독 강수한[習讀 姜壽瀚·후손 세거지 의령군 화정면 덕교], 참판 심기일[參判 沈紀一·후손 세거지 의령군 화정면 보천], 승지 강언룡[承旨 姜彦龍·후손 세거지 의령군 의령읍 무동], 참판 허국주[參判 許國柱·후손 세거지 진주시 지수면 승산], 훈도 강운[訓導 姜運·후손 세거지 의령군 의령읍 무동, 용덕면 신촌], 도사 남극단[都事 南克鏄·후손 세거지 의령군 의령읍 덕곡], 판관 조사위[判官 曺士偉·후손 세거지 합천군 덕곡면 율지], 감정 강우황[監正 姜遇璜·후손 세거지 의령군 가례면 괴진]이다. 이들은 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왜적과의 싸움에 앞장섰거나, 혹은 의병활동 여러 모로 도운 명망 있는 선비들이었다.

이 기로계 모임은 416년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봄·가을 1년에 두 번씩 자리를 같이 하여 그 뜻을 기려왔다. 지금은 음력 4월 15일 한차례 11분의 후손들이 정암리 의병공원 기로십일현 유촉비를 참배한 후 팔각정에서 계모임을 하면서 조상들의 얼을 되새기고 있다.

 

○의장 이운장 순적비 (義將李雲長殉蹟碑)

기로계 11현 유촉비 옆에 임진왜란 의병장인 죽헌 이운장 장군의 순절비가 있다. 장군은 정암진 전투에서 순절했으며 정암강에는 장군의 피가 흐르고 있다. 장군은 곽재우 장군 휘하 수병장이었다.

장군(1541~1592)의 자는 희서(希瑞)이며 호는 죽헌(竹軒)이다. 장군은 의령군 궁유면 한우산 기슭에서 신축년(1541)에 태어났다. 어려서 용력이 뛰어나고 병법에 밝아 무관으로 벼슬을 했다. 장군의 벼슬이 용양위(龍驤衛) 좌부장(左部長)에 이르렀다. 장군은 병법에 능하였고 장수의 지략이 있어서 죽유 오운과 함께 곽재우장군의 군대에서 수병장이 되었다. 장군은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전장을 드나들면서 항상 선두에서 적과 싸웠다.

정암진 전투에서 왜적이 정암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 가장 앞에 나가 싸우다 전사했다. 장군이 앞장서서 용맹하게 싸웠던 모습이 후세에 전해져 정암진을 건너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곳이 운장이 충절을 지켜 전사한 곳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사한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아직 정암강 모래 진흙에 빠져있으니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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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택 2022-07-13 17:20:16
의령의 유익한 역사이야기 그리고 재미있는 전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유림 2022-07-13 15:42:55
의령의 땅 유래이야기가 벌써 11편까지 왔네요~ 앞으로도 많은 이야기 들려주세요^^
옛 조상들이 만들어 풍류를 즐기고 어려울 때 도왔던 계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는게 놀랍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