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23 (상리 상신마을)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23 (상리 상신마을)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3.01.12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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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리(上里) 상신(上新)/새터/새터말

‘상신(上新)’은 의령읍 상리(上里)의 행정마을로 산다 마을 서북쪽에 있다. ‘새터, 혹은 새터말’ 등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상리(上里)에서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이다. 의령읍이 풍덕면(豊德)과 덕곡면(德谷)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절에는 덕곡면(德谷)에 속한 구역이고 관청소재지가 있었다고 한다. 인근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게 되어 ‘신기촌(新基村)’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상신(上新)’이란 이름은 1914년 일제가 지명 개편을 하면서 붙인 것이다. 마을 입구에서 보면 벽화산 아래 산코숭이에 무성한 대밭이 있고 대밭 아래에 기와집이 위엄 있게 버티고 있다.

○벽화재(碧華齋)

사진 =벽화재 전경
사진 =벽화재 전경

이 기와집이 바로 상암선생(霜嵒先生) 권준(權濬)을 기념하여 지은 벽화재(碧華齋)이다. 상암공의 묘소가 벽화재 뒤쪽 벽화산 기슭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재실 이름을 벽화재라 지었다. 공은 신등면 단계에서 태어났으나 부림면 신반리로 이사해 살았고 현재 후손이 세운 ‘세거비’와 ‘사적비’가 신반에 있지만 묘소는 이곳에 있다. 이곳은 풍수지리상 명당자리인 청룡등천혈(靑龍登天血)로 알려진 곳이다.

 

○상암선생(霜嵒先生) 권준(權濬)

공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도보(道甫), 호는 상암(霜嵒)이다. 아버지는 판관 권세인(權世仁)이며, 어머니는 이공헌(李公憲)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다.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가 되었다. 당시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한 이후 조정의 어지러운 정치상황을 수습하려 노력했다. 그 뒤 삼척·광주·파주 등지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잘 다스려 치적이 뛰어나 선정비가 많이 섰다. 어떤 고을에서는 동(銅)에다 업적을 새겨 덕을 칭송하기도 했다.

권룡현(權龍鉉)이 지은 재실기문에 “선생은 젊어서 순박한 자질과 아름다운 바탕이 있어서 돈독히 배움에 정진하여 한강 정 선생 문하에 들어가 퇴계·남명 두 선생의 학문을 배웠다. 그의 학문은 진실로 올바른 것을 얻어 실천에 힘썼다. 벼슬에 오른 뒤 권세와 간사한 것을 물리쳐 어두운 조정에서는 자취를 감추었고,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조정에는 부름에 응하였다.”라고 선생의 성품을 전해준다.

○박령재

화정면과 경계가 되는 박령재는 상신 마을 남쪽에 있으며 이 고개를 넘으면 화정면 백곡마을이다. 박령재는 강변나루와 내륙 마을을 연결하는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부산 구포에서 배를 타고 올라온 방물장사들이 화정면 장박나루에서 내려 박령고개를 넘어 내륙으로 장사하러 갔다. 혹은 고갯마루에 서는 임시 장에서 농산품과 물물교환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고개 이름을 박령재라 불렀다.

박령재 넘기 전에 작은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를 지나면 조산이 있고 조산 뒤쪽 언덕에 여우가 자주 나타나 뒷발로 흙이나 돌을 뿌리며 지나가는 사람을 놀리곤 했다. 이상하게 저수지에는 매년 익사사고가 잦았는데 이것은 저수지의 처녀귀신 소행이라는 으스스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갓골

상신 마을 초입에 있는 골짜기가 ‘갓골’이다. 박령재 가는 길목에 있다. ‘갓’은 보통 ‘산’을 뜻하거나 변두리나 위치상 바깥쪽이란 의미이다. 그래서 ‘갓골’은 상신 마을 ‘가장자리에 있는 골짜기’의 의미이다. 갓골에는 커다란 무덤 2기가 있다. 이 무덤은 잔디가 곱게 자라고 봉분이 높아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며 놀기도 했던 곳이다.

사진= 향토문화유적 상리 고분군
사진= 향토문화유적 상리 고분군

○갓골 고분

이 무덤이 이제는 비에 씻겨 봉분이 낮아지고 나무가 자라서 볼품이 없고 주변 무덤과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무덤이 바로 가야시대 고분이다. 다행히 고분 앞에 ‘향토문화유적 상리 고분군’이라는 비석이 있어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의령읍 중리, 상리 지역은 고분이 많이 남아 있는데 아직 정비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어 아쉽다.

○남재/남재골/남치곡(藍峙谷)

‘남재’는 상신 서남쪽에 있는 열두 굽이 험준한 고개이다. ‘남재골, 남치곡(藍峙谷)’이라 하기도 한다. 이 고개가 화정면 모시골로 통한다. 대곡장을 보기 위하여 주변지역 주민들이 자주 왕래하던 고개이다. 남재골에서 오른쪽으로 빠지면 운곡마을이고 무수방이 있다. 활처럼 굽은 골이 십리도 더 되고 아무리 걸어도 그놈의 산고갯길이 남고 또 남아 ‘남재’라고 불렀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있다.

○대미골/뒤미골/죽하(竹下)

‘대미골/뒤미골’은 상신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며 한자로 ‘죽하(竹下)’라 표기 하기도 한다. ‘대밭 밑 골짜기’란 뜻이다. 지명에서 ‘미’는 ‘아래, 아랫마을, 산’을 의미한다. ‘대미’의 ‘미’는 ‘아래’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대미’의 뜻을 살려 한자로 죽하(竹下)로 부른다. 토박이들이 ‘뒤미골’로 부르기도 하니 ‘뒷산 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대미골을 넘어가면 화정면 고무실(지곡)이다. 대미재 오른쪽에는 병풍덤이 있고 아래 계곡에는 저수지가 있는데 오령지(五靈池)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린다.

○오령지(五靈池)

오령지(五靈池)라 불리는 이유는 저수지 조성 공사 중 산이 무너져 다섯 명의 인부가 매몰되어 죽었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은 다섯 명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은 이름이다. 지금도 삼월 삼짓날 간단하게 제사상을 차려 위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개장골

사진=까치밥으로 남긴 대봉감
사진=까치밥으로 남긴 대봉감

‘개장골’은 상신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개장골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개장골이 예전에는 ‘애장(아이무덤)터’였다고 전한다. 지금은 대봉감 과수원으로 변했다.

상신마을 전체가 감나무 과수원으로 덮혀 있다. 겨울 감나무에는 까치밥으로 남긴 홍시가 달려있다. 산새가 먹으라고 남긴 것이지만 지나가는 배고픈 나그네가 까치밥을 따먹기도 한다. 서리를 맞으며 만들어진 홍시라 맛이 있지만 특별히 친구가 따주는 까치밥이 최고로 맛있다. 잘생기고 빛깔 좋은 것을 먼저 건네주고 다음 것을 제가 먹으니 얻어먹는 까치밥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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