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3 부림면 입산리(立山里) 입산(立山)마을Ⅱ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3 부림면 입산리(立山里) 입산(立山)마을Ⅱ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4.02.2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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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마을교사 김진수
마을교사 김진수

 

약 600년전 탐진 안씨 시조가 개성 장단에 살다가 이성계 역성혁명(易姓革命)때 창녕 영산으로 피난했다. 서울에서 3대로 관직에 봉직하다 1500년 초에 경산 안골(內谷)로 이주하였다. 1600년 경에 한 고승의 예언을 따라 살기 좋은 입산으로 이주하여 10대로 종가(宗家) 천석지기 부자집이 대를 이어왔다.

사진=입산 문화 역사마을 표지석
사진=입산 문화 역사마을 표지석

 

탐진 안씨는 연육세(連六世) 8효자(八孝子) 정려를 받은 효행의 가문이다. 임진왜란 의병장이자 중시조인 지헌(止軒) 안기종 장군 이후 근세(近世) 조선말부터 해방이전까지 독립유공자와 제헌의원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전통 한옥이 즐비한 부촌이자 전통이 흐르는 유서 깊은 마을이지만 또한 개화의 물결을 먼저 받아들인 마을이기도 하다.

○방개봉

입산마을 뒷산을 방개봉이라 한다. 방개봉 북쪽은 좌청룡, 남쪽은 우백호라 한다. 좌청룡 끝부분 바위에 설산동문(雪山洞門)이라는 음각된 암각문 표식이 있고, 우백호 끝부분 바위에 범눈깔 바위가 있어 우백호라 하였다. 이웃 마을인 유곡면 세간리 세간 마을 뒷산인 고망산과 서로 경쟁하듯 서 있다. 세간 마을은 곽재우 장군의 출생지이며 입산마을과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다.

마을 앞 유곡천 건너 마주보며 길게 늘어진 산이 누비등(누에등)이다. 마치 누에가 길게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에 입 부분이 유곡천에 맞닿은 벼랑인데 경치가 좋았다고 한다. 이 바위가 바로 꾀꼬리 바위이다. 벼랑아래는 메워 길을 만들어 옛날의 운치는 사라졌다.

○고산재(高山齋)

고산재는 1778년(정조2년)에 안기종의 5세손인 증이조참의 설산재(雪山齋) 안여석(安如石)공이 주도하여 창건한 재실이나 서당으로 쓰였다. 수많은 인재가 고산재에서 수학 연마하여 문과와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곳에서 공부한 인물로는 수파, 송은, 백산 선생 등 애국지사들이 있다. 고산재에서 공부한 백산 안희제선생은 1910년 지금의 상로재(霜露齋)자리에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세워 경남에서 최초의 신학문 학교를 열어 인재를 양성하기도 했다.

마을 뒤쪽 산골짜기를 양지골(양지골짝)이라 부른다. 이곳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창의하고 초유사 김성일 휘하에서 참모를 하며 임진왜란 진행과정과 의병활동을 기록한 ≪용사일기(龍蛇日記)≫를 남긴 송암 이노(李魯)공의 묘소가 있다. 마을 서북쪽 동구에는 큰 소나무 숲이 있는데 그곳에 광복 후 전국 최초로 조직된 낙동강농민조합사무실이 있었던 터가 있다.

 

사진= 백산선생 생가
사진= 백산선생 생가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선생 생가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선생은 1885년 의령 입산마을에서 천석지기 양반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양정의숙(養正義塾) 재학 중인 1907년과 1908년 영남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교남학우회와 교남교육회에 참가해 구국 계몽운동 활동을 했다.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해야 함을 깨닫고 고향인 의령에 의신학교(宜新學校)와 창남학교(刱南學校)를, 동래에 구명학교(龜明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여 초대 부단장이 됐다가 이후 2대 단장이 되었다. 그리고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자금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백범(白凡) 김구(金九),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독립운동가 삼백(三白)으로 불리기도 했다.

1932년에 목단강 상류인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일대 토지를 사들여 농지를 조성하고 농민 300여 호를 이주시켜 ‘발해농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농장에 발해보통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942년 11월 19일에 신병치료차 고향에서 요양하던 중 체포되어 만주 목단강 경무청에 수감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다. 1943년 9월 2일에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곧 사망하였다.

사진=안준상 선생 고택
사진=안준상 선생 고택, 출처:방랑가족유람기

○안준상 선생 고택

안준상(安駿相, 1898~1994)선생이 나고 자란 집이다.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을 지냈다. 선생은 독립운동의 대부인 백산 안희제 선생의 조카이고, 한뫼 안호상 선생의 사촌형이다.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필사하여 옮기고 배부하며 의령지역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동래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경제학과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족숙인 백산 안희제 선생을 도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민족청년당 소속으로 제헌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고택은 1903년에 지은 것으로 입산마을에 있는 여러 건물 중 역사 깊은 것이다.

사진=안호상 고택, 출처: 의령군 공식블로거
사진=안호상 고택, 출처: 의령군 공식블로거

○안호상 고택

입산마을 안호상 고택은 1911년 건립된 것으로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6·25전쟁 때 사랑채와 대문채가 화재로 사라졌고 현재는 안채만 원래의 모습이고 나머지는 복원된 것이다. 안호상 선생은 집안 어른인 안희제선생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특히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한글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당했다. 해방 후 1945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거쳐, 1948년 정부수립 때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64년 배달문화연구원장으로서 민족사상 연구에 힘썼으며, 1966년에는 독일 훔볼트학술재단 초청으로 세계일주 학술강연을 한 선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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