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2 부림면 입산리(立山里) 입산(立山)마을 Ⅰ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2 부림면 입산리(立山里) 입산(立山)마을 Ⅰ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4.02.02 14: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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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사진= 마을교사 김진수
사진= 마을교사 김진수

 

‘입산리(立山里)’는 부림면의 법정(法定) 동리(洞里)이며 입산(立山)은 행정마을이다. 부림면 소재지에서 약 4km쯤 남쪽으로 떨어져 있고 유곡천이 마을 앞을 흐른다. 유곡천 건너가 경산, 구산, 난동 마을이다. 유곡천은 서남쪽에서 동북으로 역수(逆水)하여 흐르는 특이한 흐름이다. 옛날에는 유곡천이 입산 마을 입구까지 흘러들었으나 물길을 돌려 옛 모습은 없다. 마을 앞 도랑에 있는 땅버들나무가 옛 유곡천의 흔적을 보여준다.

예부터 역수지역에는 큰 충신(忠臣)이 아니면 역적(逆賊)이 난다는 풍수지리설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많은 충신들이 유곡천 근처에서 배출되었다. 지역 사람들은 ‘산이 와서 멈추고 물이 감싸 안아서 인걸이 나온다’고 한다.

사진=입산마을 앞 땅버들나무
사진=입산마을 앞 땅버들나무

토박이들이 부르는 마을 이름은 ‘설미 또는 설뫼’이다. ‘설’은 ‘서다’라는 뜻이고 ‘미’는 ‘산’의 옛 지역어이다. 그래서‘설 입(立), 뫼 산(山)’의 ‘입산(立山)’이라 부른다. 그러나 ‘설’을 눈 설(雪)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을 뒷산에 ‘설산동문(雪山洞門)’이라는 암각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눈 설(雪)자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곡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동네가 별미/경산(景山)이다. 양 마을은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래서 서로 경쟁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두고 서로 자기 마을이 좋다고 신경전을 했다. 경산마을에서는 ‘설뫼’가 아무리 좋아보아야 눈 덮인 산이니 햇빛(경산)이 나면 녹아 버릴 운명이니 ‘경산’이 좋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설뫼 마을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눈(雪)대신 꼿꼿이 서다(立)라는 글자로 바꾸어 입산(立山)으로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효충원(孝忠園)

사진= 입산마을 입구 효충원
사진= 입산마을 입구 효충원

입산은 효자와 충신의 마을이다. 입산마을 입구에는 효충원(孝忠園)이 있다. 여기에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의 휘하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안기종(安起宗)장군을 기리는 이충각(移忠閣)이 있다. 이 비각은 경산마을 안골에 있던 것을 여기로 옮긴 것이다. 또한 안희제선생 순국기념비, 안효제선생 행적비, 안창제선생 사적비, 안여상선생 행장비 네 기가 나란히 서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초대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 기념비도 있다. 흩어져 있던 비석과 정려를 이곳에 모아 충·효 교육장으로 만들기 위해 이 비림을 조성했다.

○칠효각(七孝閣)

효충원에서 옆길을 따라 조금 가면 탐진 안씨 팔효자 정려인 칠효각이 있다. 왼쪽부터 통운대부 행사간원우헌납 안도(安堵)공, 통덕랑 호조정랑 안경(安經)공, 통훈대부행전라도사 안건(安乾)공, 통덕랑 이조정랑 안종우(安從祐)공, 충순위 안처우(安處祐)공, 적순부위 행충순위부사정 안순민(安舜民)공, 장사랑 건원릉참봉 안윤옥(安潤玉)공, 증승의랑호조정랑 후릉참봉 안인(安仁)공 등 효자정문이 여덟 이고 그 옆에 안처극(安處極)공의 효행을 기리는 창효각과 안정(安錠)공의 부인인 열부 전의 이씨를 기리는 창렬각이 따로 세워져 있다. 그래서 칠효각은 효자 아홉 분과 열부 한 분의 정려가 모여 있다.

◯수파정(守坡亭)

입산 마을 수파정은 수파 안효제(安孝濟)를 기리며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안효제는 1850년 안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84년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887년 성균관 전적으로 등용되어 지평을 거쳐, 1889년 정언이 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는 가까스로 충주에 피난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 때 무당 이씨가 민비의 환궁일을 예언하여 정확하게 맞춰 민비의 총애를 받았다. 고종과 민비는 무당을 신뢰하여 진령군(眞靈君)이라는 군호를 내렸다. 왕과 왕비의 총애를 배경으로 진령군은 거리낌 없이 악행을 저지르고 조정 일에 관여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그녀의 눈치를 볼 뿐 감히 처벌을 주장하지 못했다. 당시 사간원 정언인 안효제는 ‘청참북묘요녀소(請斬北廟妖女疏)’를 올려 진령군을 요사스러운 계집이라 규정하고 참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이 상소로 인하여 고종이 분노하여 선생을 제주 추자도(楸子島)로 귀양 보냈다. 그 후 1894년 전라남도 임자도(荏子島)로 옮겨진 뒤 곧 귀양이 풀리고 홍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 관직이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흥해군수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합병되자 산중에 은거했다, 그해 11월 일제가 이른바 은사금(銀賜金)을 지급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여 창녕경찰서에 갇히기도 했다. 그 뒤에도 일제에 항거하고 투옥되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사진= 상로재 모습
사진= 상로재 모습

○상로재(霜露齋)

상로재는 탐진 안씨 조상을 기리고 제사지내는 건물로 건축했다. 상로재(霜露齋)라 이름지은 것은 이슬과 서리가 내릴 때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조상에 대한 추모의 정을 가지며 군자의 도리로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건물은 중앙 대청마루가 있고 양 옆에 온돌방이 있다. 조선경종 2년(1722)에 처음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다가 1922년에 크게 고쳤다. 1908년에는 백산 안희제(安熙濟)선생이 이곳에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키워낸 역사 깊은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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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림 2024-02-03 22:50:09
마을이름에 숨은 이야기가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