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면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6 (감암리(甘岩里) 옥동(玉洞)마을)
부림면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6 (감암리(甘岩里) 옥동(玉洞)마을)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3.05.26 15: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부림면 감암리(甘岩里) 옥동(玉洞)마을

‘옥동(玉洞)’은 감암리(甘岩里)의 행정마을이며 감암리 동북쪽에 있다. 부림면 소재지인 신반에서 오리길 남짓하며 적포로 가는 지방도에 인접한 마을이다. 옛날 지명은 ‘동오골’이다. 동오(동이)는 질그릇의 일종인데 둥글고 배가 부르며 아가리가 넓고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물 깃는 데 사용하는 그릇이다. 마을의 생김새가 이 물동이를 닮아 ‘동오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는 마을에 물동이를 굽는 가마가 있어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또한 복숭아나무가 많았던 골짜기라 도화동(桃花洞)혹은 동옥동(東玉洞)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동옥동이란 지명에서 동자를 빼고 ‘옥동’으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골안 북쪽에 왕령산이 있고, 동네 앞 신반천 너머 안산(案山)인 진등산 산줄기가 길게 뻗어 있고 남쪽이 열려 있는 아늑한 마을이다. 마을 입구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창골(倉洞)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옛날 세곡을 거두어 보관했던 임창(任倉)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창골에는 자연동굴이 있는데 난리가 나면 마을 사람들이 피신하던 곳이다. 마을 안쪽 저수지 위에 골짜기가 두 개 있다. 오른쪽 골짜기가 숯 골이며 숯을 굽던 터가 있다. 이곳을 파면 기와장이 나오기도 한다. 왼쪽 골짜기가 부채골이다.

 

○악넘이잿길

익구리 익구 마을로 통하는 지름길이 ‘악넘이잿길’이다. 이 잿길을 넘어가자면 땀을 흘리며 악을 써가면서 걸어야 될 만큼 가팔랐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마을 건너편 골짜기가 여시골(여우골)이다. ‘여시골’골짜기는 옛날 여우들이 집단으로 살던 곳이라 한다. 그래서 나무꾼이나 소먹이는 아이들이 꺼리는 곳이였다.

마을 들머리 산자락 밭언덕에 배롱나무가 있었던 곳에 바위벽을 파내고 면을 잘 다듬어 새긴 돌비가 있었다. 이 비석의 주인공이 대동풍아주밀양손씨덕겸옹(大東風雅主密陽孫氏德兼翁)이다. 안타깝게도 도로확장 공사하며 이 비석을 파괴했다고 한다. 다행이 허백영 전 문화원장님이 촬영한 비석 사진이 남아 있다. 그러나 비석 글자가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아 펜으로 글자를 써 넣어 가품처럼 보인다.

 

사진=손덕겸옹 돌비, 허백영 제공
사진=손덕겸옹 돌비, 허백영 제공

○손덕겸옹(孫德兼翁)

이 비석에 새겨진 글귀의 의미는 ‘손덕겸옹은 동방의 큰 나라 즉 우리나라에서 풍류와 문아로서는 단연 주인’이라는 뜻이다. 옹은 영제시조(嶺制時調) 3대 명창중의 한 분이다. 고종 때 영제시조창의 3대 명창은 경상북도 군위의 고영태, 경주의 이명서, 경상남도 의령의 손덕겸이었다. 영제시조창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발달한 시조창이다. 시조창은 서울 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제,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완제(完制), 충청지방의 내포제(內浦制)가 있다.

예로부터 영제시조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시조창이다. ‘영제(嶺制)’는 영남에서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이 시조창의 옛 이름이 바로 ‘영판(嶺版)’으로 영남에서 찍어 냈다는 의미이다. 시조창이 음악성이 있고 아름다워 ‘영판 시조창이 너무 좋다’는 의미로 ‘영판 좋다’를 외쳤다. 그러나 지금은 의미가 확대되어 어떤 일이 아주 좋을 때 ‘영판 좋다’라고 한다. 영제시조는 독특한 음악성으로 인하여 전국 각지의 시조인들이 널리 애창한다. 또한 점잖고 격조가 높아 궁중에서도 숭상하고 애창하기도 했다. 영제시조 명인 손덕겸옹의 무덤은 홍도고개 못 미친 부림면 막곡마을 양지쪽 산자락에 있다.

현재 의령에는 무형문화재 영제시조 예능보유자 이종록 선생이 자비로 전수관을 열어 영제시조 보급을 위해 애쓰고 있다.

 

○추원재(追遠齋)

사진=옥동마을 추원재
사진=옥동마을 추원재

옥동 마을 중앙 양지바른 곳에 진양정씨 돈재(遯齋)공 정중수를 추모하는 재실이다. 당초 다른 곳에 건립했으나 이곳으로 1957년에 이전 건설했다. 그러나 지금은 관리가 되지 않아 마당에는 나무과 풀이 우거져 묵답처럼 버려져 있고 접근하기 어렵다. 재실의 중건과정이 중건기에 나와 있다. “예전부터 재실을 계곡 서편에 지어 조상을 추모하며 해마다 제향을 드릴 때 머무는 곳으로 건립했다. 6.25한국전쟁을 겪으며 폭탄이 떨어져 집이 기울어 보수하였으나 몇 년 후에 태풍 피해를 입어 기와가 부서지고 담과 벽이 무너져 지탱할 수 없었다. 이에 온 종중이 이건하자는 의논이 일어 새로 건축하였다. 새로 지은 집은 선조를 받들고 종족을 모으는데 부족함이 없다.”

 

사진 =백원재 현판
사진 =백원재 현판

○외골마을/와야골

옥동마을에서 익구리 쪽으로 가면 산골짜기에 몇 집이 살고 있는 동네가 나온다. 토박이들은 ‘와야골’이라 부르는 외골마을이다. 마을 안에는 의령읍 상리 산다마을과 주변 지역에 살다가 이주해 온 개성 왕씨가 살고 있다. 집 뒤편에 백원재(百源齋)라는 개성 왕씨 재실이 있다.

옥동마을은 산골짜기에 들어서 있어 밖에서 보면 마을이 잘 숨겨져 있고 뒤에 높은 산이 있어 물이 맑고 아늑한 곳이다. 마을 이름이 아름답고 영제시조 명인의 흔적이 있어 더욱 각별하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