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0 부림면 경산리(景山里) 경산(景山)마을Ⅰ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0 부림면 경산리(景山里) 경산(景山)마을Ⅰ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3.11.1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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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사진 = 마을교사 김진수
사진 = 마을교사 김진수

 

▣부림면 경산리(景山里) 경산(景山)마을

‘경산리(景山里)’는 ‘경산(景山), 박진(泊津)’ 두 행정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토박이들은 ‘별미/볕뫼’라 부르기도 한다. ‘별’은 벼랑의 옛말이고 ‘미’는 ‘산(山)’의 옛말이므로 ‘별미/볕뫼’는 ‘벼랑이 있는 산’이란 뜻이다. 특별히 마을 뒷산에 있는 벼랑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별미 또는 부미’로 불렸던 것이다. 이 이름을 다시 한자로 음과 훈을 빌려 표기하여 성산(星山)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경산(景山)으로 바꾸었다. 한자어‘볕 경(景)’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표기한 ‘경산(景山)’은 토박이 지명 ‘별미’와 의미적으로 관련성이 없는 것 같다. 다만 경산마을 뒷산 벼랑에 햇빛이 비치면 벼랑이 환하게 빛나면 주변 경치가 특별히 아름답기 때문에 ‘경산(景山)’으로 적었을 가능은 있다.

사진 =경산 마을 숲, 왕버들, 느티나무 군락
사진 =경산 마을 숲, 왕버들, 느티나무 군락

강가 마을이라 살기 좋아 선사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의 역사가 깊어 마을에는 가야시대 고분군이 있었는데 모두 일제 강점기 때 도굴되었다. 1914년 ‘경산동(景山洞), 박진동(朴津洞) 낙서면(洛西面) 부곡동(釜谷洞) 일부’를 ‘경산리(景山里)’로 바꾼 이후 오늘에 이른다.

역사가 오래된 동네답게 ≪宜春誌≫ 에 경산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의춘지에는 경산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잇다. “경산리(景山里)는 고성이씨, 전의이씨의 세장(世庄)이다. 병풍이 늘어선 듯한 지세이며 인물이 배출되었다. 초계정씨가 산다. 남쪽은 낙산원(洛山院)의 유지가 있고 동쪽은 박진나루(朴津)가 있다. 그 위 산마루는 곽충익 장군이 둔병하던 성곽이 있다. 동쪽에는 지헌(止軒) 안기종(安起宗)의 유허비가 있다. 박진(朴津)에는 아호정(鵝湖亭)이 있으니 안익상(安翊相)이 놀며 쉬던 곳이다.”

사진 = 마을 정자 앞 들돌
사진 = 마을 정자 앞 들돌

풍수지리상 서북방을 가려야 지기를 비보한다고 해서 마을 앞 냇가를 따라 왕버들나무와 느티나무 등으로 길게 마을 숲을 조성했다. 그 당시 조성된 숲이 아직도 무성하고 아름답다. 특히 왕버들나무는 오래되고 나무모양이 좋아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다른 지역과 달리 경산마을 숲은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숲 전체를 보호지역으로 지정하여 체계적으로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당산나무인 느티나무는 죽었으나 다행히 마을 사람들이 아들 나무를 구해서 잘 키우고 있다. 마을 앞 정자와 마을 안쪽 정자나무 근처에는 커다란 들돌이 늘어서 있다. 들돌은 ‘들어올리는 돌’이라는 뜻이다. 전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이나 2월 초하룻날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머슴이나 마을 청년이 돌을 들어올리면, 어른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품값을 받을 때에도 어른의 품값을 받을 수 있었다.

 

○무듬실/무덤실

큰길을 따라 박진 고개쪽으로 조금 가면 안골(내곡, 내동)이 있고 마을을 조금 벗어난 곳에 무듬실/무덤실이 있다. 이곳에 가야시대 고분이 많이 있다. ‘무듬실’은 경산 동쪽에 있다. ‘무덤골’이 있는 산이란 뜻이다. ‘무듬’은 ‘무덤’을 의미한다. 예전에 무듬실이 고려장터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가야시대 고분이 여러 기 있었는데 여러 차례 도굴을 당했다. 무듬실을 지나 있는 산고개는 ‘잣고개’인데 박진나루와 백산쪽으로 통하는 길이다. 또 안골마을 뒤 산고개가 있는데, 높고 가파르다. 여기서 한 고개를 더 넘으면 지정 태부 쪽으로 이어진다.

 

○송영단(送迎壇)

경산 마을 회관 큰 정자나무 옆에 있는 돌로 만든 단을 송단 혹은 ‘송영단(送迎壇)’이라 부른다. 이것은 옛날 선비들이 마을을 방문하면 말에서 내리고 말을 매어 두는 곳이다. 또 이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전송했다고 한다.

 

사진=금란정 모습
사진=금란정 모습

○금란정(金蘭亭)

임진왜란이 끝나고 향촌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도덕과 윤리가 무너졌다. 주변지역의 질서를 회복하고 지역사회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향약을 실시했다. 경산마을 인근에 살던 여덟 유력 문중의 대표들이 모여서 서로의 정분을 두텁게 하고 의리로서 사귄다는 취지로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했다.

금란계는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예리함이 쇠를 자를 수 있고, 마음을 같이하여 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 계는 1629년에 계를 처음 모았고 10여년이 지나고 계원이 모이는 장소로 금란정(金蘭亭)을 건립하여 향약의 실천과 미풍양속의 선양을 주도했다. 금란계는 농촌부흥과 일제 강점기는 향촌사회의 단합과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재 금란정(金蘭亭)은 퇴락하고 있어 안타까움이 크다.

이러한 금란계(金蘭稧)의 지속적인 활동 내력을 기록한 의령 금란계안(宜寧 金蘭稧案) 12권이 부산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2018년 3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우리고장의 자랑스런 문화재인 금란정과 금란계안을 잘 보존하지 못한 것은 후손인 우리들의 책임이다. 남아 있는 문화재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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