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4 부림면 경산리(景山里) 박진(泊津)마을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4 부림면 경산리(景山里) 박진(泊津)마을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4.02.26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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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마을교사 김진수
마을교사 김진수

 

▣부림면 경산리(景山里) 박진(泊津)마을

박진은 부림면 ‘경산리(景山里)’에 속한 강변마을이며 경산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며 예부터 물물교환을 하던 나루터가 있었다. 부산 구포, 다대포에서 올라오는 장사배들이 남강, 낙동강 상류로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중간에 쉬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창녕지역과 왕래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박진나루는 외부 소식과 문물이 전달되는 창구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박진(泊津)이란 지명의 정확한 유래는 모르나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선 시대 과거를 보러간 박진이라는 사람의 아명(雅名)을 따서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사진=박진 마을 옹기터
사진=박진 마을 옹기터

그리고 ‘옹기, 질그릇’ 등을 만드는 곳으로 마을 전체가 수박의 윗부분 모습을 닮기도 하고 ‘박’과 ‘진흙토기(土器)’가 유명해서 박진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마을에서 나는 흙이 좋아 뒤쪽 산코숭이에 옹기 굽는 가마가 여러 기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가마가 모두 없어졌고 가마터는 대밭으로 변했다. 옛날 가마가 있었던 곳을 파면 옹기조각이 많이 나온다.

그밖에 ‘박지실’이라 부른 적도 있기 때문에 줄여서 ‘박진’이 됐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박진(泊津)’이 ‘배대는 곳’이란 뜻이 있기 때문에 ‘박진(泊津)’이 나루 이름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박진(泊津)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설은 박진(泊津)의 여러 가지 마을 특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와 다르게 박진의 이름에 관해 다음과 같은 애틋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박진나루의 전설

옛날 이 마을에는 가난한 뱃사공의 아들 박진수라는 총각이 있었다. 인물 좋고 영민한 이 총각은 과거에 급제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집안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공부했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진(陳)씨 처녀와 서로 사랑했고 급제하면 혼인하기로 서로 굳게 약조했다. 그 처녀는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효녀로 이름날 정도로 마음씨도 고왔다. 세월이 흘러 박 총각은 과거를 보러 서울로 떠났고 진 처녀는 박 총각이 장원급제하기를 밤마다 치성을 드리며 빌고 빌었다.

사진=박진나루 모습
사진=박진나루 모습

어느 날 진 처녀가 마을 뒤 산고개 너머 밭에서 목화를 따고 있는데 못된 불한당이 처녀를 겁탈하고 말았다. 정절을 지키지 못한 가책으로 처녀는 그만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한 달 뒤 총각은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했으나 사랑하는 진 처녀를 만날 수 없었다. 뒷산 벼랑 위에 처녀가 벗어놓은 짚신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비통한 심정의 박 총각은 벼랑위에서 강물에서 떠오르는 처녀의 환상을 보았고, 이 환상에 이끌려 강물에 뛰어내려 죽었다. 애처로운 전설에서 박씨 총각과 진씨 처녀가 죽은 나루라 해서 ‘박진나루’가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박 씨와 진 씨가 많이 살고 있어서 ‘박진골’이라 불리는데 나중에 ‘박지골’로 바뀌었다고 하니 있을법한 이야기다. 처녀가 짚신을 벗어놓고 뛰어 내린 바위가 ‘각시덤’이고 덤 바로 아래는 장정 열 길이 넘는 깊은 소(沼)가 있다. 특히 처녀들은 각시덤을 지나갈 때 발아래 강물을 내려다보면 안 되고 발걸음을 조심했다고 한다.

 

○박진에 대한 기록

박진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창녕 편에 "박지곡진(朴只谷津)은 박진(朴津)이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10리며 의령과 통한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박지곡진(朴只谷津)을 줄여서 박진이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 『대동지지』 의령 편에 "박진(朴津)은 동북5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 의령 편에는 경산면(현재 부림면) 박진포(朴津浦)로 표기되어 있다.

 

○조양재(朝陽齋)

조양재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안찬 공이 쓴 조양재 상량문에 보면 ‘산을 등지고 물에 임한 터를 얻어서 이에 비로소 앞처마와 뒷기둥을 재단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조양재는 낙동강변 산언덕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많은 재실이 6.25한국전쟁 중 박진마을이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 최전방이라 유엔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이 때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하니 박진 주변의 낙동강변은 거의 바위절벽이다. 그러나 박진 마을로 가는 고개는 나지막해서 쉽게 강변 쪽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6.25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박진을 창령 마산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활용했다.

 

사진 =박진전쟁기념관, 출처 : 창녕군 블로그
사진 =박진전쟁기념관, 출처 : 창녕군 블로그

○박진전투

박진지역은 마산, 부산으로 진출하려는 인민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국군과 유엔군이 서로 대치하는 최전선이었다. 당시 북한 최정예 부대인 제4사단이 낙동강을 건너 강변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에 선제공격을 하며 침공을 시작했다. 8월 11일 인민군은 성공적으로 도강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영산면까지 밀어냈다.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전투 초기 열세를 만회하고 9월 15일까지 일진일퇴의 치열한 혈투를 전개하여 버티다 마침내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인민군을 낙동강 너머로 밀어냈다.

이곳 박진 전투의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6•25전쟁 등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낙동강 지역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전쟁의 흐름이 바뀌고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박진지구 전적비와 박진 전쟁기념관이 강 건너 남지읍 월하리 월상 마을에 있다.

박진 마을은 100여 년 전 김해김씨가 최초로 입촌하였고 이후 박씨 집안이 살았다고 한다. 이제는 다리가 생기면서 박진나루는 그 기능을 잃었고 강을 따라 고깃배만이 강을 떠다닌다. 마을 주민은 점점 줄어들고 철새들이 강의 주인이 되어 마음껏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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