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면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4 (신반리(新反里) 현동)
부림면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4 (신반리(新反里) 현동)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3.04.15 12: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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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부림면 신반리(新反里) 현동(縣洞)

‘현동(縣洞)’은 부림면 신반리(新反里)의 행정마을이다. 부림면 소재지 마을인데 신반 동북쪽에 있다. 옛날 신번현(新繁縣)이 의령(宜寧)과 통합되기 전에 현청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현동(縣洞)이라 불렸다. 즉 ‘현(縣) 관아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현동 373번지가 바로 옛 신번현 관아(官衙)가 있었던 자리이다. 지금도 당시에 쌓았던 돌담장(돌담부랑)이 조금 남아 있다.

현재 부림면은 옛날 보림리, 부산리, 경산리(당시의 리는 오늘의 면에 해당한다) 3개리를 통합하면서 부산리의 첫 글자와 보림리의 뒷 글자를 조합하여 부림면으로 바꾸었다.

 

□ 기미 3·1독립운동 기념비

사진 =기미삼·일독립운동기념비
사진 =기미삼·일독립운동기념비

현동 오지산 기슭 신반공원에는 기미년(1919년) 3월 15일 신반장날 일어난 신반지역 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신반장날 만세운동은 3월 14일 의령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최정학이 신반으로와 정주성에게 등사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시작했다. 정주성은 최한규, 장용환, 황상환과 협의해 15일 신반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들은 정오가 되자 장 복판에서 재빨리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모인 이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게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1985년 광복 40년을 맞아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널리 알리고 또한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신반공원 기미3·1독립운동 기념비 옆에는 6·25 전몰군경을 추모하기 위한 충혼비와 월남참전유공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외세의 침략이 있거나 국난을 당할 때 마다 신반지역 사람들은 누구보다 앞장서 항거했고 끝까지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신반지역은 6.25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 최전방 지역이라 피해가 극심했다. 특히 신반면사무소 호적이 불타 없어져 전쟁이 끝나고 호적 복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진=대부정 및 옥천군 유허지비
사진=대부정 및 옥천군 유허지비

○옥천대(玉川臺)

감암리 대밭골에 살고 있던 권란(權鸞)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곽재우 장군의 의병에 가담하여 돌격장(突擊將)이 되었다. 국란을 당하자 자신과 가족의 안전 보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했다. ≪용사일기≫보면 “안기종은 유곡에 매복하였다. 이운장은 낙동강 서편을 관장하고, 권난은 옥천대를 차단하여 끊었다(安起宗設伏于柳谷 李雲長管于洛西 權鸞遮截於玉川臺)”라고 나와 있다. 장군이 옥천대에 진을 치고 왜군과 싸웠던 그 장소를 정확하게 지적할 수 없으나 대부정 뒤편 설계조공이 낚시하던 곳이 옥천대라는 기록은 있다. 의병이 진을 치고 지켰던 곳은 대부정 뒤편 신반공원과 장군이 처음 정착했던 감암리 대밭골 뒤편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한다.

 

○대부정(大夫亭)

옥천부원군 설계조(薛繼祖)공이 은거하며 지내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공은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55년(세조1)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지고 용양시위사후령호군(龍驤衛衛司後領護軍)이 되었다. 1463년(세조 9) 경상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에 제수되었고,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향인 순창에서 부림면 신반리로 이거하여 살았다.

설계조 공은 신반리 경치 좋은 곳에 대를 쌓고 집 뒤에다 정자를 지어 한가롭게 지내며 풍월을 읊고 낚시와 거문고로 유유자적 지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정자를 대부정(大夫亭)이라 했다. 그리고 근처에 옥천대가 있었으나 병난에 소실되었다. 인근에 있는 들판을 옥천들이라 부르는 이름 속에 공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대부정 뒤 석벽에는 각자된 글자가 있다.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대는 ‘상지33년’(1896)추정 ‘병신 4월 일’로 새겨져 있고, 주변 암벽에는 새겨진 글자가 많이 있으나 긴 세월 풍화로 마모되어 판독하기 어렵거나 판독해도 그 의미를 추론하기 힘든 형편이다.

 

사진 =배나무진유래비
사진 =배나무진유래비

○배나무진유래비

옛날 신반리 일대에 제방이 없을 때 낙동강이 자주 범람하여 그 물길이 역류하여 침수되었다. 역류한 물은 빨리 빠지지 않아 하천 수위가 높아져 부산 구포에서 올라온 장사배들이 각종 물건을 판매하려 모여들었다. 장사배들이 동네 입구에 서 있던 커다란 팽나무에 줄을 묶고 닻줄을 내려 장사를 하곤 했다. 그래서 정자나무 밑 그늘이 장터가 되고 물건을 팔던 장이 섰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토박이들은 ‘배나무진’이라 부른다. 현재 복지회관 앞에 ‘배나무진유래비’가 서 있다. 이 비석은 1987년 8월 안상호 씨가 세운 것이다.

 

○경남한지공업협동조합

사진= 옛날 경남한지공업협동조합 한지 창고
사진= 옛날 경남한지공업협동조합 한지 창고

신반에는 인근 지역뿐만 경상도 여러 지역에서 생산된 한지를 유통하는 시장이 있었다. 한지 생산을 표준화하고 한지 유통의 질서를 잡기 위하여 1960년에 지역의 선각자들이 지역주민과 함께 ‘경상남도한지공업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이 일에 앞장선 분이 정응진(鄭應鎭) 초대 조합장이다. 선생은 1955년 ‘신흥제지공업사’와 ‘한지 개량지연구소’를 설립하여 다양한 한지를 개발 보급하였다. 특히 한지를 이용하여 자동차 내연기관 여과 장치인 필터를 개발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알리는 송덕비가 부림공설운동장 입구에 세워져 있다

신반리 현동 현재 ‘신반철물 건재’건물이 바로 경상남도한지공업협동조합 한지 창고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 건물 바로 앞이 경상남도한지공업협동조합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조합 건물은 철거되었고 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한지 관련 역사성이 있는 건물이니 복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복원에 시간이 걸린다면 도로 삼각지 중심부에 기념비를 세워두면 후속 사업을 추진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부림면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4 (신반리(新反里) 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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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림 2023-04-18 18:06:39
와 의령에 한지공업건물이 복원되면 볼거리가 늘 것 같아요 복원되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