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항일구국의 화신 오당 조재학 무덤과 추모 기념비를 찾아서
[독자기고] 항일구국의 화신 오당 조재학 무덤과 추모 기념비를 찾아서
  • 의령 인터넷 뉴스
  • 승인 2022.03.24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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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항일독립운동가 오당 조재학 선생 문집 2019년 10월에 국역으로 발간한 책에서 발췌 참고 하였다.
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의령지회장
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의령지회장

 

◆ 오당의 생애

우리고장이 낳은 인물가운데 오당 조재학(迕堂 曺在學) 또한 발자취가 두드러진 분이다. 한말의 격변기에 태어나서 슬기로운 의지로 시대의 격랑을 헤쳐간 이, 오당 조재학, 그가 걸어간 파란만장의 일생을 더듬어 보고 후세의 우리는 오랜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조재학의 자는 공습이요. 본관은 창령이니 오당은 그의호다.

조선왕조 5백년의 사직이 저물어 가던 1861년 9월 4일,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528번지에서 그는 이 마을의 유생 춘호공 조익환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자질이 뛰어난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한학을 익히고 약관에 이르러 면암 최익현을 찾아 사사하게 되니, 면암은 특히 그를 총애하였다 한다.

그는 또 연재 송병준의 문하에도 수학하니 바야흐로 학문과 경륜이 성숙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나라사정은 그로하여금 가만히 학문에만 전념하도록 놓아 두지를 않았던 것이니, 이때는 이미 조선을 강점하기 위한 일본의 책략이 대궐의 담장을 무시로 넘나들고 있었고, 나라 안 도처에서는 민란이 일어나 흉흉하던 민심이 갈바를 잃고 방황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 스승 면암의 순절

1883년, 그는 전국의 유생들과 함께 국기정도를 바로잡기 위한 만인소를 올리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 잡고 민심의 안정을 기하자는 이 나라 유생들의 충정, 그러나 그들의 위국충정 만으로는 하마 대세의 흐름을 꺾을수는 없었다.

1905년, 마침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니 이제는 저들 일본의 침략자들과 대항하는 길은 오직 한가지 의병을 모아 무력으로서 대적하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이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면암을 도와서 주로 호남지방을 근거로 의병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나, 이도 역불급으로 좌절되니 이듬해(1906) 면암 최익현은 적지 쓰지마의 고도에서 마침내 순절하고 말았다.

면암의 순절은 그에게 대단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는 즉시 쓰지마로 달려가, 스승의 시신을 운구하여 예장을 치르니 이로서 제자의 도리는 다한 것 만은 아니었다.

면암의 영전에 엎드린채, 그는 다시금 스승의 거룩한 유지를 이을 것을 다짐하니, 이로부터 오당의 파란만장한 항일구국의 고달픈 역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 고종의 밀조사건

1910년 경술국치를 맞아 오당은 완전히 붓을꺾고 책을 덮어 버렸다.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던 한가닥의 희망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였다.

1914년 4월, 그는 고종으로부터 눈물겨운 호소가 담긴 밀조를 받은 것이 사단이 되어 일경에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호되 추달 끝에 울릉도로 유배되어 1년간의 귀양살이를 하게된다.

이듬해 적소에서 풀려난 오당은 주로 기호지방을 무대로 유림들을 설득하여 항일세력의 기반을 넓혀 나갔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마침내 1919년 저 유명한 파리장서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제2의 3.1운동으로도 불리는 이 파리장서운동은, 그해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리나라 유림들이 장서의 호소문을 보낸 사건인바, 이장서는 그때 유림대표로 심산 김창숙이 휴대하여 갔던 것이다.

전국의 유림대표 137인의 이름으로 작성된 이 장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우리나라 강점 사실과 그들의 포악무도한 만행 사실을 낱낱이 수록하고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의 결의를 구제정의에 호소하는 2천만 민족의 피맺힌 절규였던것이니, 여기에 우리 고장에서는 오당과 또 한분, 정곡면의 수산이태식이 서명했던 것이다.

이어 1921년 그는 이상규 맹보순 등 동지들과 함께 조선 고사연구회를 발기하여 인도공의소를 세우고, 이를 거점으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펴 나갔으나, 일제의 갖은 박해로 뜻을 펴지 못한채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이때, 그의 나이 이순을 넘긴 63세 였다.

 

◆ 남강변에 심은 만절

1927년,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향리로 돌아온 그는 남강변의 한적한 곳에 단간 초옥을 짓고 당호를 봉소암이라 부르니 이곳은 의령군 화정면과 진양군 지수면의 접경이다.

여기서 15년간 두문불출 칩거하면서 세상을 등진채 음풍농원의 선경에서, 그는 또 스스로 농토를 일구고 곡식을 심어서 거두며 살았다.

초당 봉소암 주변에는 매실과 산수유, 행자목과 벽오동이 숲을 이루니 황조백학이 쉽사이 없이 날아들었다.

우국의 거유이자 항일구국의 화신이던 그는 이렇게 세속과 절연한지 16년이 되는 1943년 5월 14일, 조국광복의 기쁨을 이태 앞둔채, 홀연히 세상을 버리니 향년 83세였다.

그는 임종을 지키던 자손돠 후학들에게 유언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뚜렷한 일을 하지도 못한 내 이름은 후세에 남기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향리의 후학들은 그의 유덕과 항일구국의 거룩한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74년, 오당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고 2년뒤, 오당 조재학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아울러 그의 묘소도 새로 정화하였다.

부림입산 고산정에서

넓은 물결 일렁이는 한 외로운 산에,

어진 사람에게 열 이랑을 하여했네.

돌벼랑 겹겹이 기운 기르기에 합당하고,

구름 소나무 울창하여 기뻐할 만한 곳이네.

깊은 연못 밤에는 어룡이 엎드려 있고,

먼 포구 이슬이 차가운데 기러기는 돌아가네.

이 정자를 흠앙한 지 일찍부터인데,

하얀 머리로 오늘 비로소 오르네.

 

권석오 봉희께 드리다

1894년(갑오) 정월 16일

늦은 절개가 어찌 그리 탁월하십니까, 기강이 추락하는 처지를 당하여 음탕하고 사약한 것이 길을 막고 차츰차츰 스며들어 긴긴 밤 같은데 우리 어르신의 한 상소가 아니면 우리 조정이 오랫동안 길러온 교화와 공자⋅맹자의 도를 5백 년 동안 가르쳐 온 풍습이 장차 천라 후세에 드러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상소를 얻어 옷깃을 여미고 비장하게 읽어보고 한 편지로 하례하고자 했으나, 여러 달 동안 병을 앓아 정신이 없어지고 또 편지를 전해줄 계기가 없어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8월 어르신의 아들을 서울에서 만나 이 뜻을 설파했는데, 온 조정에 한사람도 우리나라를 태평하게 했다고 하레를 하는 사람이 없고 서로 탄핵을 다투는 것이 한탄스러웠습니다. 이어거 영해의 걸음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놀라 스스로 상심했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것은 주자가 말한 노거광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향 친척과 문하생, 친구들은 또한 미리 영광스러운 일에 기뻐하면서 마음을 상할 것은 없고 축하를 하되 위로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삼가 살피지는 못했지만 바다를 건넌날이 오래되었다고 하니 근력은 어떻습니까, 비바람에 신음라고 독기 어린 안개와 푹푹 찌는 가운데 벌레와 뱀과 짝하고 원숭이와 새들과 열을 지어 살고 있으니 험난한 상태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도 미리 대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멀리 또는 가까이 귀천, 가릴 것 없이 부녀자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무릇 양심이 있는 사람은 공분하기 않을 수 없습니다. 혼자 바라건대, 하늘과 땅의 신이 또한 반드시 감응하여 묵묵히 도와 장차 조정의 소명이 있을 것이니 공손히 기다리십시오.

저는 지난가을 장질부가 세상을 떠나 비통하고 원망스러움이 견디기가 어려운데 거기다가 어린 아이가 세상을 떠나 더욱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인데 다행히 부모를 모시고 그럭저럭 보내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더욱 의로운 절개를 편안히 여겨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뜻을 이루는 데 부응하십시오.

 

권 석오께 드리다

1896년(병신)2월 12일

요즘 군무중 몸을 보위하고 계십니까, 근래 소식은 요즘 다시 어떠하십니까?

임금님을 모시고 언제 길을 떠납니가, 삼가 저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버이를 모시고 에전처럼 있는데 어찌 번거롭게 아뢰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요즘 힘쓸 것은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을 부르고 군대를 모집하고 곡식을 모으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어찌 처리하고 있는지요.

마음이 격분하여 앞장설 것을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뒤지지 않으나 스스로 제 기량을 돌아보면 한 가지 일도 맡을 수 없어 한갓 여러 사람의 비웃음만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고 수초부를 찾고자 하였으나 평일 가르치고 아낀 정을 저버릴 수 없어 여러 조목의 제 의견을 별지를 사용해 올립니다. 삼가 주장에게 널리 알려 채택하시기를 빌겠습니다. 나머지는 나라를 위해 보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진=오당 조재옥 선생이 1927년 부터 1943년 서거하실 때까지 17년간 진주와 의령 접경지역 남강 가에 초옥을 지어 봉소암이라 편액하고 은거하였다.
사진=오당 조재학의 무덤
사진=오당 조재학 선생의 무덤
사진=오당 조재학의 추모비
사진=오당 조재학 선생의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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