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선무 원종 공신 증 승정원 좌승지 조사남 사적비와 묘소를찾아서
[독자기고] 선무 원종 공신 증 승정원 좌승지 조사남 사적비와 묘소를찾아서
  • 의령 인터넷 뉴스
  • 승인 2022.03.14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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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조사남 묘비에 관한 내용은 신경환 전 향토문화사 소장이 지난 2015년 12월 현직에 있을때 집필한 의령의 금속문화 156~8쪽에 실린 내용을 이후 다시 재 정비한 내용이다. 
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 의령지회장
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 의령지회장

화정면 상정2구 마을에서 전덤이 방향으로 0.1km 지점 마을끝자락 떨어진 지방도에 선무원종공신 증 승정원 좌승지 창녕조공 휘 사남 사적비있다. 도로 건너편에는 상정리 지석묘(고인돌)군이 있기도 하다.

◎선무 공신 증 승정원 좌승지 조사남 사적비

우리 선조 25년 임진년 왜적이 침범할 때에 조공 사남이 있었는데 곽장군 군대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 하다가 군중에서 죽으니 실은 그해 10월초 4일이었다.

공의 자는 백능이요. 조씨의 관향은 창녕이며 시조의 휘는 계룡인데 신라 부마도위다 그 뒤로 8대의 평장과 6대의 소감이 있었고 세상을 빛낸 이름난 덕이 역사에 많이 실려 있다. 조부의 휘는 신이요 아버지의 휘는 계헌이며 참봉이요 어머니는 문씨인데 응상의 딸이다.

가정 39년(1560년)경신년에 공을 의령 수성촌에서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 재주가 다른 아이들보다 특이 하였고 성장함에 미치어서는 체격의 골간이 장대하고 용맹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서 기운 부림을 좋아해도 의리를 무거이 하였다 매양 사람과 대화함에도 왕왕 강개하여도 만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글을 읽는 겨를에는 또한 말 타는 방법 익힘을 즐기니 참봉공이 그 뜻을 기이하게 여겨 금하지 아니하였다. 성품이 지극한 효도라 집이 본디 가난했지만 동생 사영과 더불어 몸소 나무하고 밭 갈고 하여 단맛을 이바지하였고 비록 자식의 업이라고 일을 들겠으나 어버이 늙음으로서 차마 곁을 떠나 과거시험에 달려가지 못하고 오직 자식 직분을 다함으로써 평생의 계획을 삼으니 온 고을이 칭송하며 가로되 조씨 효자라 하였다. 망우당 곽공과는 같은 고을의 친한사이라 마음 벗으로서 하교하였다. 임진년 봄에 왜적이 추풍령 왼쪽 여러 고을을 찔러서 함락하니 모두 그 위세를 바라보고는 달아나고 흩어졌다. 곽공이 곧 의병을 일으켜 적을 막을 때에 공은 늙은 어버이를 받들고서 고을 남쪽 석척산에 피신하였는데 곽공이 거사람을 듣고는 곧 칼을 지팡이 하고서 절하며 말해 가로되 우리 집은 비록 먼 지역에 떨어져 있으나 또한 대대로 녹을 먹은 후손이니 어찌 임금과 아버지의 위태함을 앉아보고서 내 몸만 온전히 하랴 다행히 한 동생이 있으니 가히 어버이를 봉양하겠고 나는 장차 국란에 달려가리라 하고 그의 동생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해 가로되 이 위태한 난리를 만났으니 사대부가 모두 자기만 온전 하려한 즉 임금과 부모는 어찌 하겠나 나는 장차 곽공과 더불어 같이 죽으리니 너는 머물러서 우리 어버이 받들며 조석끼니 이바지에 게으럼이 없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곽공의 진영에 나아가니 곽공이 크게 기뻐하며 맞이해 가로되 백능이 오니 나의 일이 구제되리라 하고 이제야 여려 의병과 더불어 함께 곽공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군으로 굴했는데 모든 군중의 대소사무는 곽공이 반드시 공으로 하여금 관리케 하였고 한 계책이 있으면 반드시 공과 더불어 확인에 참여시켰고 발언에도 일찍이 곽공을 위하여 추종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비록 행군이나 진영사이에 있더라도 매양 열흘 만에 한번은 어버이를 살폈고 일찍이 글을 남겨 동생을 훈계해 가로되 충과 효는 다름이 없고 임금과 부모는 하나같은지라 나는 장차 충성을 나라에 다하리니 너는 마땅히 집에서 효도를 다하여 바위와 골짜기의 사이에서 따스하고 서늘함이 마땅함을 잃고 숨어 피하는 즈음에 배고프고 배부름을 맞추기 어려우니 너는 거기에 힘쓰되 선비들을 먹이는 때에 혹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품에 싸서 달려가 어버이에게 드려라. 그 정성어린 효도는 감히 잠깐이라도 풀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같은 공이 재주와 용맹을 자부하여 진영에 다 달아서는 문득 적을 가벼이 하는 뜻이 있기에 곽공이 항상 훈계하였지만 고은 조금도 꺽이지 아니하였다.

왜적이 기강의 남쪽에서 우리의 외로운 군사를 보고서 북진을 항거함이 반드시 쉬우리라 하고 선발대로 하여금 급류에 배를 태워서 가죽 씌운 배로 건너서는 물을 막고 포탄을 비같이 퍼부으니 충동의 기미가 호흡하는 사이에 결단 나는지라 공이 크게 부르짖으며 가로되 사람의 신하되어 의리로 이 적과 더불어 살지 못한다 하고는 곧 먼저 오를 새 군사들은 미친 듯 한번 차고서 적의 배에 올라가 장검을 휘드르며 어지럽게 지르니 형세가 회오리바람 같은지라 배 가운데의 적이 삽시간에 소멸되어 감히 그 칼날을 가까이 갈수 없어서 적이 드디어 크게 패배하여 물러갔는데 한 왜적이 거짓으로 찔린 것같이 시체 쌓인 가운데에 엎드려 있음을 공은 죽은 왜적으로 보고 지나치니 왜적이 곧 뒤에서 공의 등을 찌르기에 공이 곧 몸을 돌려 베고는 대수롭지않게 궁중으로 돌아오니 곽공이 손을 잡고 크게 슬펴하며 가로되 내가 공을 경계함은 바로 이를 위함이니 어찌 명이 아니겠나 하였다.

공은 조금도 슬픈 얼굴 없이 가로되 죽을 때에 죽어서 가죽에 싸임이 족하니 다시 무엇이 한 되겠나 원컨대 고향으로 반장하되 부모로 하여금 상심 품음이 없도록 하라 하고는 드디어 칼을 던지고서 절명하니 이해의 시월 모일에 본 고을 상정리의 선영 밑에 장사하였다. 대개 이런 죽음은 굳센 적을 부수고 군의 사기를 들램은 오직 공의 한번 죽는힘인데 곽공이 과감하게 조정에 들리게 해서 포상하지 못함이 의심스럽고 그 외로운 충성과 장렬함이 드디어 가리어서 들래지 못했으니 가히 애석함을 이기겠다 망우당집 가운데에 있어 가로되 조모는 먼저 배에 올라 칼을 휘둘러 어지럽게 찌르다가 마침내 거짓으로 죽은 왜적으로 찔린바라 공이 크게 슬퍼하였다 하였고 김학봉의 용사일기(임진왜란 실기)에서도 또한 같으니 견주어 봐도 가히 공은 썩지 아니하리라. 진양정씨부사 증의 손녀에게 장가갔는데 아들이 없어서 동생 사영의 차남 국익으로써 후사로 삼으니 문행으로써 벼슬에 천거되어 성현찰방이요 그 후손도 또한 면면히 이어왔다. 아! 감탄하도다 충과 효는 본디 둘을 이룰수 없으나 그러나 항간에 맡겨서 스스로 수양하는 선비는 혹 효도에는 힘쓰되 초야의 가운데에서 분기하여 싸움터에서 죽음을 맹세하고 적을 항거하다가 임금에게 남기려 하지 아니하니 자신을 죽여서 그 인을 이룸은 공 같은 아 자못 그런사람 없어리라 공은 효도에서 시작하여 충성에서 마치니 어찌 더욱 어려움이 되지 않겠나. 전(책이름)에서 가로되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도의 집안에서 하라 하였으니 공에게서 보겠도라 이제 그의 동생에게 준 글과 죽을 임시 두어마디 말을 읽어보면 그 충렬의 기운이 늠름히 살아있는 것 같고 기강의 대첩에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수십만이 함부로 달려드는 무리로 하여금 감히 강을 지나지 못하게 해서 물러가게 한 즉 비록 당나라 수양(중국지명)의 보장과 비교해도 또한 부끄러움이 없다고 뜻을 밝히노라.

조사남 묘비는 금동마을에 있는데 화정면사무소에서 2km정도 떨어져 남서방향으로 가면 마을 뒤 허영태 집 뒤 동쪽 양지에 관리하는 이 없는 비석처럼 외롭게 서 있다. 갓 없는 비석으로 비 높이는 180cm, 폭 72cm, 두께 28cm이다.

사진=조사남의 묘소
사진=조사남의 묘소
사진=조사남의 묘소
사진=조사남의 묘소 앞 비석
사진=조사남의 묘소
사진=조사남의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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