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아천정(我泉亭)을 찾아서
[독자기고] 아천정(我泉亭)을 찾아서
  • 의령 인터넷 뉴스
  • 승인 2022.10.1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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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 의령지회장
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 의령지회장

의령군 화정면 상일리 보천마을을 바라보면서 좌측 앙골에 있다. 남강(南) 심의정(沈宜定)이 장수 강학지소이다. 주범(秋帆) 권도용(權道溶)이 기문을 지었다.

 

◎심의정(沈宜定)

사진=아천정

화양리동안 제 26책(1936)에 이수 심의정의 서문이 실려 있다. 심의정은 기미년 (1859~1942) 생이고, 자는 중여中汝, 호는 남강南岡이다. 용계(龍溪) 의문의 7세손이다. 천성이 성실하여 부모를 섬김에 오직 효성으로 정성을 다하였으며, 독서에 낙을 붙여 경서에 밝았고, 문사에 뛰어났다. 과거에 응하려 하였으나, 시대에 구애되어 시골에 있으면서 벽산 양지에 정자를 지어 아천정이라 편액을 걸고 의관과 의복을 단정히 하여 앉아 고서를 벗 삼았다. 남에게 항상 부드럽게 함으로 모두가 우러러 보았다. 문집 『남강유고』가 전한다. 권1은 시⦁만사, 권 2는 서⦁잡저⦁행장 등이 실려 있다.

화양리 동안 18책, 19책, 20책에 21책, 22책(1916년), 23책(1952), 24책(1927)에 입록되었고, 25책(1930)에는 도검이었고, 77세인 1936년 화양리의 이수가 되어 그 소감을 남겼다. 심의정은 합천 삼가 출신 후산 허유의 문인이었다. 후산은 내암 정인홍과 한강 정구를 사사했던 창주 허돈의 후손이고, 경북 성주 출신 한주 이진상의 문인으로 자신이 비록 퇴계의 학맥이라 하더라도 내면에 남명에 대한 존모의 생각이 매우 깊었던 인물이다.

한편, 심의정의 부친은 심능태이며 화양리 동안 17책(1870), 18책(1884)에 입록되었고, 모친은 창녕조씨이다.

화양리 동안 1책(1646), 4책(1667)에 입록된, 용계 심의문은 자는 회보이고, 심기일의 손자다. 효우는 천성이었고, 학문이 뛰어났다. 부친 병환에 단지 진혈하여 7년을 연수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 3년에 애회함이 예를 넘었고, 모친상에도 그러하였다. 일찍 진사 반영, 문익창에게 수업하였다.

 

만각당(晩覺堂)을 찾아서

사진=만각당
사진=만각당

만각당은 의령군 화정면 상일리 보천마을을 바라보면서 우측 맷골에 있다. 당초에는 안골에 망각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후손 심재욱 가정집을 만각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심상지(沈商知)가 강학하던 곳이다.

심재, 조긍섭(趙兢燮)이 기문을 지었다. 자손들이 업을 익히는 곳으로, 심재욱의 관계는 고고조부이다.

 

심상지(沈商知)

경수(敬叟)요, 호는 만각(晩覺)이다. 증 병조참판의 7세손으로 영조 신묘생(1771)이다. 재주가 초범하여 처음 통사를 읽는데, 눈을 스치면 문득 기억하고 11세에 상정 조진사 명계집에 지내니 진사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 책상 위에 연적을 가르키며, 시를 지어보라고 명하니 곧 짓기를, “둥글기는 장부의 주먹 같고, 아름답기는 젊은 부인의 유방 같네. 삼상의 물을 머금어 와서 때때로 붓더라.”하니 진사가 감탄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도하여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끊었고, 어머니의 병환에 얼음 가운데 잉어를 얻었다 한다. 젊은 적엔 재주를 믿고 공명에 뜻을 두었으나, 몸이 건둔하여 만나지 못하고 집을 남호상에 지어서 만각이라 이름하고 글을 지어서 뜻을 보였다. 만각당 유고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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