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면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3 (신반리(新反里) 중동(中洞), 동동(東洞))

2023-03-27     김진수 편집위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김진수

 

▣부림면 신반리(新反里) 중동(中洞)

‘중동(中洞)’은 부림면 신반리(新反里)의 행정마을이다. 현동 서쪽에 있으며 부림면 소재지의 중심부이다. 지금은 신반천이 신반리를 우회하여 흐르고 있지만 옛날에는 신반 중심지로 흘렀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 물이 많이 났으며 도랑이 있었다. 마을 도랑을 따라 땅버들나무가 늘어서 있었고 맑은 물이 흘렀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도랑이 있었기 때문에 중동마을을 ‘수축’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부림면(富林面) 단원리에 ‘수축’마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하여 ‘중말(중몰)’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옛 기록에 부림면 ‘중촌(中村)’이란 이름이 나온다. 이 기록으로 판단하건대 ‘중동(中洞)’이라는 지명은 옛날 ‘중촌(中村)’에서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선앞도랑/현앞도랑

 

중동에는 신반천이 가까워 물이 많이 흘렀다. 신반리 중심지 도랑이 소천정 부근을 지나 흘러 나갔다. 이 물길은 길게 이어졌으며 한겨울에도 가장자리만 조금 얼 뿐 얼지 않았다. 냇물이 옛 신번현(新繁縣) 현청 앞으로 흐르기 때문에 현앞도랑이라 부르다가 발음하기 편하게 ‘선앞도랑’이 되었다고 한다. 이 도랑은 마을 중심을 지나 면사무소 쪽으로 흐르며 시원한 친수공간을 제공했으나 지금은 복개되고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맑은 물이 흐르던 선앞도랑의 모습을 이제는 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

 

○소천정(小泉亭)

소천정은 1916년에 건립한 아담한 정자로 장만익(張萬翼)선생이 거처한 곳이며 자연보호중앙협의회가 선정한 한국의 100대 명수(名水)로 알려진 자연수(샘물)가 있다. 특히 정원 중앙에 자리한 이 자연수는 100년 이상 심한 가뭄에도 고갈된 적이 없을 정도로 항상 맑은 물이 샘솟았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지하수가 끊겨 맑은 물이 솟아오르던 샘은 바닥이 드러나고 갈라져 있다.

아담한 정원에는 작은 정자와 중국 만주지역과 금강산 등지에서 수집해 온 수석, 꽃나무 등이 어우러져 방문객이 많다. 이 아름다운 정원을 꽃밭 속의 작은 정자라 하여 사람들은 ‘꽃밭사랑’이라 부른다. 현재 이곳 정원에는 정자 등의 한옥 건물뿐만 아니라 100년 이상 오래된 수목과 진귀한 화초, 수석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전통 정원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2020년 4월 산림청이 주최하고 서울경제·한국정원협회·월간가드닝이 공동 주관한 ‘2020 아름다운정원 콘테스트’에는 전국 100곳의 명품 정원이 응모해 치열한 경쟁을 했다. 공공과 개인분야 정원에서 모두 13곳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는데 소천정이 개인정원 부분 장려상을 수상했다.

○서재골

중심가에서 큰 내를 건너 산골짜기로 한참 올라가면 북쪽에 옛날 재실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재실이 바로 동화재이며 재실이 있는 골짜기를 서재골이라 불렀다.

 

○동화재(東華齋)

동화재는 매죽헌(梅竹軒) 권덕중(權悳中) 공이 창건하여 강학하던 곳이다. 기록에 보면 “만덕산 재석봉아래 동화재(東華齋)를 세웠는데 집이 노후 되어 보수하였으나 황폐해졌다”고 한다. 매죽헌 공은 학덕 높은 선비로 존경을 받은 분으로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그래서 공에게 글을 배우고자 서재골 골짜기로 모여든 선비들이 구름같이 많았다. 이제는 그 재실은 사라지고 서재골이라는 이름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부림면 신반리(新反里) 동동(東洞)

‘동동(東洞)’은 부림면 신반리(新反里)의 행정마을이다. 신번현(新繁縣)이었을 때 보림리(寶林里)의 내외장(內外場)이 있던 동네로 알려져 있다. 마을 들머리에는 큰 내와 긴 다리가 있다. 신반 현청을 기준으로 보아서 안 장터와 바깥 장터가 모두 동쪽에 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동동으로 정한 것이다.

 

사진

○챙이덤/장보암

‘챙이덤’은 신반 동쪽에 있는 덤이다. ‘챙이’는 곡식을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인 ‘키(箕)’의 토박이 말이다. 바위의 모양이 챙이를 닮았기 때문에 부르는 이름이며 ‘덤’은 ‘큰 바위’나 ‘벼랑’을 가리키는 지역어이다. 이곳은 문중의 족보를 보관하는 곳이기 때문에 장보암(藏譜岩) 혹은 기암(箕岩)으로 부르기도 한다.

장보암에는 처음에는 권(權)씨 두 문중, 정(鄭)씨 두 문중, 곽(郭)씨, 서(徐)씨, 조(曺)씨, 한(韓)씨 등 8개 문중이 공동으로 족보를 보관했으나 뒷날에는 곽씨, 한씨 문중이 빠지고 6개 문중이 족보를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장보암에 족보 보관을 시작한 시기는 장보계를 조직한 뒤인 고종 33년(1896년)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족보를 보관하고 3∼4대가 지나서 새로운 족보가 만들어지면 계모임을 열고 새로운 족보보관을 위하여 개봉했다고 한다. 그러나 6.25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어 1951년에 임시 개봉한 적이 있었다. 장보암 사진 중앙에 하얗게 시멘트를 바른 부분이 족보를 보관한 곳이다.

장보암 바로 옆에 송암사(松菴寺)라는 절이 있는데 옛 이름은 옥련암(玉蓮菴)이다. 송암사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절벽이 좌벽과 우벽으로 나눠져 있다. 이 암벽은 손가락 한 개 또는 두세 개 정도가 들어갈 만한 구멍 손잡이가 많아 암벽 등반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 전국의 암벽등반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송암사 뒤편 바위벽 근처에 상여를 보관하던 곳이 있는데 이곳을 ‘생이덤’이라 한다. ‘생이’는 ‘상여’의 토박이말이다. 장보암과 생이덤 주변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찾는 사람이 많고 지금도 계속 정비를 하고 있어 앞으로 좋은 관광지로 탈바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