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6 부림면 단원리(丹原里) 단원(丹原)마을1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6 부림면 단원리(丹原里) 단원(丹原)마을1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4.05.27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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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마을강사 김진수
마을강사 김진수

 

▣부림면 단원리(丹原里)

‘단원리(丹原里)’는 부림면의 법정(法定) 동리(洞里)이며 ‘율리(栗里), 단원(丹原), 수축(水築)’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단원이라는 지명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토박이들은 ‘부미, 부산’이라고 부른다. 옥고개 오동숲에 봉황새가 모여들어 부자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부뫼/부미’라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가 있다. 단원(丹原)마을에 둥근 언덕이 있기 때문에 ‘부산’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부산’의 ‘부’를 ‘가마솥 부(釜)’로 생각하여 ‘솥뚜껑’같이 둥근 언덕에 위치한 마을로 생각한 것이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지지자료>에 보면 ‘부산면(富山面) 단원동(丹原洞)’이란 지명이 나타난다.

이 자료를 통해 유추해 보면 ‘부산(富山)’과 ‘단원(丹原)’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개편 이전부터 써 왔던 전통적인 지명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현재 사용하는 단원리(丹原里) 리는 1914년에 옛 부산면(富山面)의 ‘율곡동(栗谷洞), 수책동(水策洞), 단원동(丹原洞), 정곡동(井谷洞), 보림면(寶林面)의 이현동(二縣洞)’ 일부를 ‘부림면(富林面) 단원리(丹原里)’로 개편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도록 사용되고 있다..

단원리는 역사가 오래된 지역이라 의령에 관한 잡지인 ≪의춘지宜春誌≫<부림면>에 단원리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단원리(丹原里)는 강씨, 인천 이씨 두 성씨가 산다. 마을 밖은 예전에 고성이씨가 살았다./丹原里 姜 李仁川 兩氏 居之 洞外 有李氏固城 舊居”

 

▣ 단원마을

단원마을은 뒤에는 남방골산(147m)이 있고 앞에는 안산인 자라(자래)산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수축 마을이 있고 수축마을 앞으로 유곡천이 흐른다. 남방골산 넘어는 부림면 신반리이고 신반천이 흐른다. 즉 앞에는 유곡천 뒤에는 신반천이 흐르고 그 사이에 단원리가 위치해 있다. 단원리 중심에 단원마을이 있다. 단원 마을 아래쪽에는 송촌 혹은 솔밭등이라 불리는 소나무숲이 있다.

 

사진=솔밭등 묘역 석상
사진=솔밭등 묘역 석상

○솔밭등

솔밭등은 단원 마을 입구에 있으며 탐진 안씨 종중산이다. 솥뚜겅처럼 완만한 곡선으로 볼록하게 솟아있고 잔디가 잘 자라 옛날에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마을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주민들이 애쓰고 있다. 중앙에는 큰 산소가 있으며 산소에는 석상 2개가 있다. 모습은 마을 어귀에 있는 석장승과 비슷하다. 솔밭등 석상은 산소에 해학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어 엄숙한 묘역의 분위기를 약간 부드럽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안창제(安昌濟)공 무덤

사진= 송은공 안창제 선생 묘
사진= 송은공 안창제 선생 묘

솔밭등 아래쪽에는 항일애국자이신 송은(松隱) 안창제(安昌濟)선생과 그의 부인 성산 이씨의 무덤이 있다. 공은 항일애국지사이셨던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선생 동생이다. 묘역은 관리가 잘 되어 있고 비석이 깨끗하고 글씨가 분명하다. 송은 공은 무관이었으며 항일독립에 앞장섰던 분이다.

마을 뒤쪽에 고개가 있다. 신반장 보러 넘어 다니던 산고개이다. 그래서 이름이 장터고개(장턱고개)이다. 이 길은 이웃 마을인 율리(밤실)마을로 통한다. 마을에 들어서면 왼쪽에 산이 있는데 봉양산이다. 이 산 초입에 있는 골짜기가 서재골이다. 이 산코숭이에 옛 정취를 풍기는 건물이 있는데 의봉재(儀鳳齋)이다. 이곳은 옛날에 한문서당이 있어 서재골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공부하러 출입하는 학생 수가 많았다고 한다.

 

사진= 의봉제 모습
사진= 의봉제 모습

○의봉재(儀鳳齋)

봉양산을 등지고 서재골이라 불리는 곳에 있다. 성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이극명(李克明)공이 연산군 조에 연산군의 혼란한 정사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단원마을에 은거했다. 이 분이 바로 인천 이씨 입향조이다. 은거한 이후 공은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고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이러한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의봉재를 건립하였다. 의봉재(儀鳳齋)재라 이름 지은 것은 공의 높은 덕이 봉황을 닮았기 때문이다. 봉황이라는 전설의 새는 덕이 빛나는 곳을 돌아보고 또한 도의가 있어 도의가 없는 곳은 머물지 않는 다고 한다. 만약 덕과 도의가 없으면 그 곳을 떠나 자신이 은거하는 곳으로 돌아간다. 공의 삶이 봉황의 이런 특성과 닮았던 것이다. 의봉재 바로 옆에 쌍명재(雙明齋)가 있다. 건물이 아름답고 솟을대문이 높이 솟아있어 전체적으로 위엄이 있으며 관리가 잘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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