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면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2 (신반리(新反里) 대문동(大門洞)
부림면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2 (신반리(新反里) 대문동(大門洞)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3.03.0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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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부림면 신반리(新反里) 대문동(大門洞)

‘대문동(大門洞)’은 부림면 신반리(新反里)의 행정마을이다. 서동마을 바로 아랫동네이며 현동 서남쪽에 있다. 대문동을 감싸듯이 둘러선 산이 바로 ‘오지산’이다. 산의 형태가 손가락 다섯 개를 닮았기 때문에 오지산이라 부른다. 대문동은 이 다섯 손가락 중에 검지와 중지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신반공원 올라가는 길이 현동과 대문동의 경계이다. ‘큰 대(大)’자와 ‘문 문(門)’자를 써서 표기한 ‘대문동’은 혹은 ‘큰 문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허백영 원장에 의하면 대문동(大門洞) 마을 이름 유래는 다음과 같다.

“마을 뒷산이 오지산(五指山)인데 그 아래 지금 부림초등학교 자리에 의춘 옥씨(玉氏) 큰 부자가 살았다. 그는 만석꾼으로 신반 지역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 이 옥씨 부잣집을 중심으로 일가(一家) 스물 네댓 집이 모여 한 동네를 이루고 살았는데 동네 밖으로 돌담장(돌담부랑)을 쌓고 마을 입구에 크고 높은 솟을 대문을 달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대문 외에 모든 집에는 아예 담도 울도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나 외부 사람들이 드나들 때는 이 대문을 통해서 왕래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이 마을을 ‘대문동(大門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 대문동 마을 입구 조산
사진= 대문동 마을 입구 조산

○대문동 입구

마을 입구에는 옛날 솟을 대문은 사라지고 대신에 아담한 조산(막돌탑)과 마을 이름을 알리는 돌비가 서 있다. 조산은 마을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돌을 쌓거나 혹은 던지면서 안전과 복을 비는 장소이기도 하다. 규모는 작으나 꼭지돌이 우뚝하고 형태도 잘 잡혀 윤곽이 명확하고 비교적 원형이 살아 있다. 마을 돌비 옆에는 안동 권재두(權載斗) 행적비(行蹟碑)가 서 있다. 마을 사람들이 권재두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마을 입구에서 초등학교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경림재(景林齋)라는 아담한 재실이 있다.

 

 

○경림재(景林齋)

사진=경림재
사진=경림재

보림거사 권치형(權致亨)공의 후손들이 세운 재실이다. 공은 상암선생(霜嵒先生)의 증손(曾孫)이며 진사(進士) 하정공(荷亭公)의 아들이다. 일찍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학업은 거절하고 명성과 출세에도 뜻을 끊고 신반리에 보림정사를 지어 벗을 맞이하며 거문고를 켜고 책을 읽으며 지냈다. 이러한 선생의 높고 순결한 뜻을 잇기 위하여 지은 재실이다. 이 재실은 대문동 마을회관 근처에 있으며 정결하고 단정한 모습이다. 예스러운 멋은 없으나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기 편하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현재 제사를 지내거나 문중 모임 장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관리가 잘 되고 있다. 경림재에서 부림초등학교 쪽으로 가면 석오정사(石梧精舍)가 있다.

 

○석오정사(石梧精舍)

사진=대문동 석오정사
사진=대문동 석오정사

석오정사는 석오(石梧) 권봉희(權鳳熙)의 학덕을 계승하기 위하여 신반리 대문동에 세운 재실이다. 공의 자는 성강(性岡)이요, 호는 석오(石梧)이다. 석오공은 1837년에 출생하고 고종 경오년에 과거 합격하였다. 사간원의 사간(司諫)·정언(正言)·홍문관수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884년(고종21) 7월, 1886년 정월과 7월, 1893년 3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상소를 제출하였고, 1893년 8월에 다시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면 근검절약하고 기강을 세워야 한다는 상소를 제출하였다. 조정을 비난하는 무엄한 내용이 담겼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흑산도안치(黑山島安置)형을 받았다. 다음 해인 1894년 6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배형으로 감해졌다가 곧이어 방면되었다. 그 후 귀양에서 돌아와 김제군수로 제수되었으나 조정 분위기가 다름을 느끼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삼가 황매산중(三嘉 可山)에 집을 짓고 일체 외부 출입을 하지 않고 시를 읊으며 오로지 나라 일을 걱정하시다 타계했다. 석오정사에서 공의 학덕을 계승한 사람들이 모오계(慕梧契)라는 계를 조직하고 계회를 열고 석오공을 추모하는 행사를 했다. 지금은 방치되어 숭덕(崇德)이라는 편액과 퇴락하여 무너져 내리는 지붕이 대조를 보이며 기울어지고 있다.

 

○선압골

‘선압골’은 신반정보고등학교 뒤 현 ‘상암선생 세거비’가 있는 뒤쪽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옛날 상암공 세거비 뒤쪽에 큰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 이 숲은 서동, 대문동 일대의 정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서동과 대문동 경계쯤에 커다란 선돌이 있었다. 그래서 선돌이 있었던 주변을 ‘선압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이 선돌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중요한 문화재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옛 시절 신반리에 살고 있던 권씨는 문벌 좋고 가문이 번창하여 사람들이 ‘신번 권씨’라 부르기도 했다. 가문의 사람들의 학문과 덕행이 널리 알려져 집안 일이 있으면 말 탄 손님들이 줄이어 찾아 왔다고 한다. 서동과 대문동 일대에 권씨 문중 관련 유적이 많이 있고 주변은 전통의 멋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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