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20 (중리 운곡마을)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20 (중리 운곡마을)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2.11.2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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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의령읍 중리(中里) 운곡(雲谷)/남밖

‘중리(中里)’는 의령읍의 법정(法定) 동리(洞里)이며 ‘운곡(雲谷), 척곡(尺谷)’ 등의 행정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에 있는 마을’ 혹은 ‘중심이 되는 마을’이란 뜻의 중리(中里)는 한자어 지명이다. 중리(中里) 남쪽에 상리(上里)가 있고, 북쪽에 하리(下里)가 있다.

의령읍은 옛날 풍덕(豊德)과 덕곡(德谷)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의령의 종합지리지인 ≪의춘지≫ <의령면>편에 중리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중리(中里)는 예전 가항(加項), 척현(尺峴)이라 했다. 신안 주씨와 칠원 제씨 두 성씨가 산다. 주씨는 운곡(雲谷) 영당(影堂)이 있고 제씨는 삼충각이 있다. 벽화산성(碧華山城)이 마을 앞을 가로막는다.(中里 古稱加項尺峴 朱新安 諸漆原 兩氏所居 今朱有雲谷影堂 諸有三忠閣 碧華山城遮截洞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척현동(尺峴洞), 가항동(加項洞), 하동(下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풍덕면(豊德面)에 편입하였다가 1922년 풍덕면이 의령면이 되었다. 현재의 ‘중리(中里)’는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과정에서 만든 지명이다.

○운곡(雲谷)/남밖

‘운곡(雲谷)’은 의령읍 중리(中里)의 행정마을이며 토박이들은 ‘남밖’이라고도 했다. 운곡과 척곡 마을은 나란히 있는데 현재 척곡 마을 이장집 옆을 흐르는 개울을 기준으로 두 마을이 갈린다. 척곡 마을에서 볼 때 운곡은 ‘척곡의 남쪽으로 바깥 마을’이기 때문에 이를 줄여서 ‘남밖’이라 부르기도 한다.

○도동사, 운곡강당

사진=주희 영정이 있는 도동사, 운곡강당
사진=주희 영정이 있는 도동사, 운곡강당

운곡은 신안 주씨 집성촌이다. 신안 주씨 한국 시조인 주잠은 주희(朱熹)의 증손(曾孫)이다. 주잠은 남송이 원나라에 패망하자 1224년에 고려로 망명하여 주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주씨는 능주(綾州), 나주(羅州), 전주(全州), 웅천(熊川), 함흥(咸興) 등의 여러 세거지 본관(本貫)을 사용해왔다. 그러다 1902년(고종 39)에 종중의 합의로 의정부 찬정(議政府 贊政)인 월산(月山) 주석면(朱錫冕)이 대표가 되어 고종에게 상소하여 왕의 조서(詔書)가 내려짐으로써 신안(新安)을 본관으로 통일하게 되었다.

신안 주씨의 시조인 주희의 자호가 ‘운곡노인’이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 살던 주씨가 시조를 기억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운곡’으로 했다고 한다. 신안 주씨들이 시조인 주부자(朱熹)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인 도동사(道東祠)가 마을 가운데 있다. 도동사 앞에 서당으로 사용되었던 운곡강당(雲谷講堂)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강당은 의령의 유림이 주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관리가 잘 되어 있고 문이 열려 있어 돌아보기 편하다.

사진= 운곡마을 조산 모습

○운곡 조산

마을 앞쪽에 나직한 산등대가 있는데 하나는 노송이 많이 있어 솔밭등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대밭이 있어 ‘대밭등’이라 한다. 마을 입구에 운곡소류지가 있고 그 아래쪽에 돌을 쌓아 만든 조산이 있다. 다른 마을 조산은 2기가 각각 길 양 옆에 있고 꼭지돌이 하나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운곡 조산은 1기에 꼭지돌이 2개 있는 특별한 양식이다. 꼭지돌 2개가 벽화산성을 배경으로 매의 깃털처럼 날렵하게 서 있다. 다른 마을의 조산은 마을 길 넓히기 혹은 미신타파로 훼손되고 없으나 운곡마을은 주민들이 관리를 잘 하여 조산 주변 담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조산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이 여기서 당산제를 지낸다. 그래서 조산 앞에는 ‘운곡마을 동청’이라는 안내 비석이 있다.

○무수방(舞袖方)/찰방멧등

대밭등 옆의 신안주씨 선산이 있는 곳을 무수방(舞袖方)이라 부른다. 무수방은 ‘하늘에서 내려와 춤추던 선녀의 옷소매’란 의미로 이곳이 풍수지리상 명당자리라는 의미다.

주씨 사당인 도동사 건물 바로 옆 나지막한 언덕에 오래된 무덤이 있는데 토박이들은 ‘찰방멧등’이라 부른다. 이는 찰방 벼슬을 지낸 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작은 동네지만 유적 유물이 많은 곳이라 고풍스럽고 남다른 멋이 베여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 효자가 나와 나라에서 세운 하짓대(화주대)를 세웠던 ‘하짓대껄’로 부르는 곳이 있다.

○벽화산

마을 뒤 높이 솟은 산이 벽화산이다. 산 정상이 해발 511m이고 의령읍과 화정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보통 ‘벼개산’ 혹은 ‘산성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산 너머가 화정면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넘어 진주 대곡장에 장보러 다녔다. 산 중턱에는 ‘비륵’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비륵’은 지역어로 ‘벼랑’을 가리킨다. 마을 주민들은 영험이 있는 바위로 여기고 있다. 또한 ‘사선암(四仙岩)’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네 신선이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평풍덤/병풍’은 사선암 앞에 있는 덤이다.

○벽화산성(碧華山城)

벽화산에서 흘러나온 맞은편 봉우리에 벽화산성(碧華山城)이 있다. 산 정상 8부 능선에 산성이 있으며 도 지정 기념물 제64호이다. 이 산성은 가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곽 길이가 약 904m이며 홍의장군 곽재우가 임진왜란 때 진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뒤 조선 고종 13년(1876)에 현감 송기노가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산성의 형태는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모습이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해서 발권식(鉢圈式) 산성, 떡시루에 흰 번을 두른 것 같아서 시루성,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아서 머리띠식 산성이라고도 한다.

사진=의령 벽화산성고분 석실 내부, 의령군 제공
사진=의령 벽화산성고분 석실 내부, 의령군 제공

그리고 산성 동문지가 위치하는 능선에 고분 3기가 있다. 옛날에는 7기가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고분이 산 능선에 있는데 이는 인근의 의령 중동리 고분군과 매우 유사한 형태이다. 그러나 보통 고분이 낮은 구릉에 있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특이하다.

2021년 11월부터 경남연구원에서 고분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긴급발굴조사 대상고분인 1호분은 직경 20m 내외이며 높이 2.5m의 대형봉토분이다. 봉분 중앙은 도굴로 인해 크게 함몰되어 양단 벽쪽이 드러나 있으며 개석이 노출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이 고분은 전형적인 가야지역의 특징을 보여주는 횡혈석석실묘로 확인되었다.

○어은산/이음산

벽화산에 12봉우리가 있는데 제 11봉우리 이름이 ‘어음산/어은산’이다. 옛날 어씨(魚氏) 성을 가진 정승 한 분이 중앙정치의 당쟁을 피해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은산(어씨가 은둔했던 산)으로 불렀다. 특별히 이곳은 천하 명당자리가 있어 정승을 명당에 묻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순사가 이 사실을 알고 욕심을 부려 자기 부모님을 어 정승 묘 위에 매장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순사는 요절하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답사를 하니 이 지역에는 특별히 고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지표조사라도 진행하여 현황을 살피는 작업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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