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선무랑 교수 창랑강공지묘(滄浪姜公之墓) 배 의인 진양정씨부를 찾아서
[독자기고] 선무랑 교수 창랑강공지묘(滄浪姜公之墓) 배 의인 진양정씨부를 찾아서
  • 의령 인터넷 뉴스
  • 승인 2022.09.19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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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의령지회장
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의령지회장

① 강정 姜汀

자 : 도가 (道可) 병오생(1606년 추정), 문과 관지 (官至) 진주교수 (晉州敎授), 호는 호창랑수 (號滄浪叟)

배 의인 진양 정씨

묘 의령군 화정면 화양리 장박촌 후산경좌 합봉으로 유갈상주석후 손감역익수찬 명 각자미상으로 금상무오 개수함. 화양리 산 212번지에 갓 먼당 동쪽 산기슭 말미에 염창강 푸른물과 구남강 휴게소를 정면으로 끝자락에 모셔져있다.

사진= 서무랑 교수 창강 강공지묘
사진= 서무랑 교수 창강 강공지묘

현재 비석 1개가 있는데 서무랑 교수 창강 강공지묘라 새겨져 있으며 장박마을 이장신기종이 벌초를 깨끗이 하여 관리하고 있다.

소감공파는 사도소감 위용 선조를 1세로 하여 면면히 혈통을 계승하여 감찰공 처정 11세, 현령공 오덕 12세, 교수공 정 13세, 선조대에 진주에서 벼슬을 하고 승지공 경손 14세, 선조 이래 의령에 세거 하여 덕다리 현 덕교리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오늘날처럼 수많은 가지가 뻗고 잎이 무성하여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집성촌이다.

② 경손 (慶孫)

가정시묘 1539년 4월 5일 의령군 만천리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조달하고 지기가 비범하여 7~8세부터 가정교육으로 학문이 날로 뛰어나 15세,16세에는 손에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학문을 가까이 하였다. 고을 시험에 여러번 합격하고 향시에 뜻을 이루지 못하여

사진= 서무랑 교수 창강 강공 비석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천성의 효심에 지극하여 노환중의 부모님의 대소변도 남을 시키지 않고 곁에 모시며 손수 정성을 다하고 부조에 상계하여 선조 경인년에 특별히 경기전참봉령을 제수함에 모두 취임지 않고 만력 임진에 왜적이 침범함에 부군의 사위 심대원과 외손 심기일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망우당 곽공곽재우진에 달려가서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정암진에서 적을 격파할 때 군량이 떨어져 보충이 어려울 때 집에있는 양곡을 두어 창고 헐어 군사에 먹이니 곽공이 기뻐 말하기를 하늘이 도움이로다 하고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상계코자하나 힘껏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신하된 몸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곳 집을 걱정함과 같으며 만일 적이 침범하면 비록 곡식이 있다 할지라도 어찌감히 먹으리오 하니 곽공이 옳은말에 칭찬하며 상고치 못하였다. 곽공이 상고를 당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본인 또한 벽화산하에 퇴거하니 누차 불러도 모두 듣지 않으시고 천수로 하세했다. 본래 맑은 풍치가 있으셔서 춘풍 추월 호시절을 만나면 매양 여러 친구를 청해 강호에 배를 띄우고 연안을 배회하며 자연과 더불어 자적하니 소연한 티끌세상을 벗어나 선인의 기상이요 임금을 사모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하루도 잊지않았다. 경손과 심기일과의 관계는 우리 군민 모두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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