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5)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5)
  • 김진수 편집위원
  • 승인 2022.09.09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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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宜春誌≫,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사진= 향토문화 연구소 김진수
사진= 향토문화 연구소 김진수

 

□대산리 압곡(鴨谷)/오리실/압실

‘압곡(鴨谷)’은 의령읍 대산리(大山里)의 행정마을이다. ‘오리실, 압실’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전에는 마을 앞에 아주 큰 강변 둔치가 있어 보리갈이가 끝나면 오리 떼가 날아와서 월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오리가 많은 마을’이란 뜻의 ‘오리실’로 하고 한자로는 압곡(鴨谷)으로 부르고 있다. 겨울에는 마을 앞 남강에는 오리와 각종 철새 떼가 장관을 이루었다. 지금은 철새 떼가 월동하던 둔치에 의령 친환경골프장을 만들어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골프공을 분주히 쫓아다닌다. 압곡 마을은 산쪽으로 깊숙이 들어서 있어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풍긴다.

사진=압곡동석, 뒤에 깻돌이 있다.
사진=압곡동석, 뒤에 깻돌이 있다.

마을 어귀에는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인 압곡동석(鴨谷洞石)이 서 있다. 이 표지석은 신유년(1981)에 세웠다. 표지석 바로 뒤에는 동그랗게 풍화된 자연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깻돌이다. 이 돌은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석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깻돌(들돌)들기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거석행위(擧石行爲)로서 마을 소년들이 성인이 되는 관례의식의 일종이다. 이 지역에서는 깻돌이라 부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거석, 뜽돌, 쇠돌, 들돌, 등돌, 든돌, 뜬돌, 당산돌, 신돌, 초군돌, 차돌백이돌이라고도 부른다. 깻돌들기는 남자들이 힘겨루기를 할 때도 사용했다. 다른 마을 장정이 방문하면 깻돌로 힘겨루기를 하곤 했다. 또는 소년이 남의 집 머슴을 살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는지 시험하기 위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시험하는 방법은 깻돌을 들어 올려 어깨너머로 넘겨 던지면 세경을 받을 수 있는 머슴으로 혹은 장정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을 마다 그 크기가 달라 깻돌의 크기로 그 마을 장정들의 힘을 가름해보기도 했다.

사진=압곡마을 팽나무
사진=압곡마을 팽나무

○마을 보호수 팽나무

마을에 들어서면 약 350년 된 팽나무가 반긴다. 1982년 9월에 마을나무로 지정된 보호수이다. 오래된 몸통에 푸른 이끼가 덮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수세가 강하여 검푸른 녹음이 약 35m정도 펼쳐져 있다. 이 그늘에 정자가 마련되어 있어 마을사람들이 더위를 피한다.

○ 초계정공방혁송덕비草溪鄭公邦爀頌德碑

마을 어귀에는 앞면에 전교동교련관겸율포권관前喬桐敎鍊官兼栗浦權管초계정공방혁송덕비草溪鄭公邦爀頌德碑라 세겨진 비석이 있다. 송덕비의 주인공 정방혁공은 호가 송오(松塢)이고 자가 주오(周五)로 1871년 출생했다. 공은 율포(栗浦) 권관을 지냈다. 권관이란 종9품 토관직으로 주로 함경도와 평안도의 두만강·압록강 등지의 최전방 변경지대에 배치된 무관이다. 지리적 요충지인 경상도의 삼천포(三千浦) 및 율포(栗浦)에도 배치되었는데 공은 율포 권관을 지낸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공은 압곡에 살면서 항상 이웃에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다. 특별히 천대받던 유랑하는 걸인들을 잘 대접하고 적선도 후하게 했다. 그의 은공을 입은 8도의 걸인들이 비용을 마련해서 송덕비를 세웠다. 걸인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송덕비니 어떤 송덕비보다 더 의미 깊은 비석이라 할 수 있다.

처음 걸인들이 세운 비석은 도로 확장 포장공사를 하면서 없어지고 새 비석을 2006년 2월에 압곡마을 입구 도로변에 세웠다. 송덕비 앞면에는 ‘선재선재천생지인善哉善哉天生之仁’(선하고 선하도다 천성으로 타고난 의로운이로다) ‘편석기덕천추송신片石記德千秋頌新’(작은 돌비를 세워 공의 덕을 세세토록 기억하리라)고 공의 덕을 기록했다.

○영모재(永慕齋), 송오정(松塢亭), 화암정사(華巖精舍)

영모재(永慕齋)는 초계정씨 재실이다. 삼가 묵동에 살고 있던 초계 정씨 일가가 방혁 공의 증조부인 원윤(元允)공의 대에 이르러 대산리 압곡으로 이주했다. 이주한 후로 제사드릴 곳이 마땅하지 않아 1919년에 부친의 명을 받은 방혁 공이 중심이 되어 세웠다.

송오정(松塢亭)은 초계정씨 송오 방혁 공을 모시는 재실이다. 송오 공은 고종 신묘년(1891)에 무과에 급제하고 계사년(1894)에 교동교련관을 지냈다. 연이어 율포 권관으로 옮겼다가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부모님의 모시고 이웃에 선행을 베풀며 살았다.

사진=영모재·송오정·화암정사 모습
사진=영모재·송오정·화암정사 모습

화암정사(華巖精舍)는 초계정씨 화암처사(華岩處士) 방지(邦智)공을 기념하는 누각이다. 공은 송오 공의 동생으로 형제가 모두 부모님을 극진히 섬기고 조상을 잘 섬겨 효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공의 자녀 이규 씨는 일제강점기 일본 북방탄관에 강제 징집되어 온갖 고초를 당했으나 고난을 극복하고 일본에서 성공하였다. 고향을 생각하며 부친의 유덕을 잇기 위하여 1985년 이규 씨가 중심이 되어 화암정사를 건립했다. 마을 초입에 초계 정씨의 재실인 영모재·송오정·화암정사 세 기와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풍스럽고 돋보인다.

○모원재(慕遠齋)

김영 김씨가 압곡마을에 정착한 것은 화계공(華溪公) 휘(諱) 한걸(漢傑)때이다. 공은 거창에서 태어나 살다 옥천으로 갔다. 옥천에 가 보니 마을터가 거칠고 썰렁하여 살지 못하고 다시 가족을 이끌고 내려와 남쪽에서 오랫동안 떠돌다 의령 압곡에 정착했다. 그의 후손이 압곡을 떠나지 않고 대대로 살게 되었다. 김영 김씨 일족이 선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문중재실이 바로 모원재이다.

○가는골/세곡(細谷)/세동(細洞)

토박이들이 ‘가는골’이라 부르는 골짜기는 압실 북쪽에 있다. ‘세곡(細谷), 세동(細洞)’이라 부르기도 한다. ‘좁은 골짜기’라는 뜻이다. 이 골짜기 뒤에 ‘갓골’이 있다. 압곡 마을의 ‘갓골’은 지형(地形)이 날짐승의 볏이나 길짐승의 뿔을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 ‘갓골’은 짐승의 뿔을 뜻하는 ‘각골’에서 나왔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갓’은 가장자리, 변두리를 의미한다. ‘갓골재’는 압실 북쪽에 있는 고개이고 이웃 만상마을로 통한다.

○산박골

압곡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가 ‘산박골’이다. 농지가 부족하여 산비탈을 개간한 작은 밭이 이어져 있어서 ‘산박골’이라 부른다. 산박골을 지나 중리(中里)로 통하는 작은 고개가 바로 ‘이개재’이다. 이개재는 산 주인이 이씨(李氏)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씨 소유의 산에 있는 고개라는 ‘이가재’에서 ‘이개재’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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