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9)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9)
  •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사
  • 승인 2022.06.03 21:0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에게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 땅 이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상을 보는 방법, 독특한 자연환경, 고유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땅 이름은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산을 지키고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의령문화원에서 펴낸 ≪우리고장 땅 이름≫, ≪宜寧의 地名≫,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사진=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사진=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 봉무산/왕띠

봉무산은 의령군청 뒤쪽에 있는 나지막한 산으로 충혼탑이 있다. 옛 이름은 봉덕산이었으나 의령 현감 황덕유가 산세를 살펴보니 읍의 뒷산이 봉황이 춤을 추는 듯한 형세라 봉무산으로 고쳤다. 그러나 토착민들은 ‘왕띠’라 부른다. ‘왕띠’의 ‘왕王’은 ‘임금’을 가리키고 ‘띠’는 택호의 ‘00댁’에 해당하는 낱말이다. 그래서 왕띠는 ‘왕비가 살았던 곳’의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 안동김씨 김조근金祖根이 순조33년(1833)∼헌종1년(1835년)까지 2년 남짓 의령현감으로 재임在任했는데 관사에서 딸과 함께 살았다. 이 딸이 헌종의 왕비인 효현왕후가 되었다. 왕비가 어린시절을 보낸 집 뒷산을 ‘왕띠’라고 부르고 있다.

그녀는 1828년(순조28)에 태어나 1837년(헌종 3) 10세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4년 뒤 가례嘉禮를 올리고 헌종의 정비가 되었다. 헌종의 어머니는 풍양조씨 신정왕후神貞王后이며, 효현왕후孝顯王后는 안동김씨 김조근金祖根의 딸이다. 이때는 풍양조씨와 안동김씨가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대립하던 시절이었다.

안동 김씨 가문으로서는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세도정치의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었으나 당시 서서히 침몰하는 배와 같은 조선에는 커다란 바위를 얹은 것과 같은 것이 되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대립정치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했는지 효현왕후는 2년 후인 1843년(헌종9) 16세의 나이로 소생 없이 요절하였다.

 

○ 왕띠 고목나무

사진= 왕띠 고목나무
사진= 왕띠 고목나무

의령군청을 오른쪽 옆을 돌아 올라가면 왕띠 초입 언덕에 고목나무가 있다. 이 고목나무의 속은 검게 타고 비어있다. 옛날 고목나무 속에 토종벌이 집을 짓고 꿀을 모았는데 사람들이 목청을 따기 위하여 불을 피워 연기를 내려다 나무에 불이 붙어 속이 검게 탔다. 다행히 나무는 살아있어 아직도 봄이면 새 잎이 돋아난다. 왕띠는 봄이면 아름다운 벚꽃이 피어 군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의령초등학교 학생들에게는 봄이면 찔레순을 꺾어 먹으러 가거나 송충이 잡으러 가는 곳이기도 했다. 때때로 누군가 “야! 왕띠 고목나무 아래서 만나자”하면 누가 센지 한번 겨루어 보자라는 도전의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청춘남녀가 이 말을 하면 왕띠에서 몰래 만나자는 데이트신청이기도 했다.

 

○ 일본 신사神社

왕띠 계단을 통하여 올라가다 보면 왼쪽 가시나무가 있는 곳에 일제강점기에 설치한 일본신사가 있었다. 신사는 일본의 민속신앙인 신토神道의 신을 모시는 시설을 말한다.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가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겉으로는 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뜻이나 그 속셈은 조선인이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나가고 각종 부역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철저한 민족말살정책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조선에 일본신을 모시는 신사를 만들고 신사참배와 일본 왕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는 동방요배를 강요했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 집요하게 강요했는데 필자의 외조모 구월이 권사를 포함하여 기독교인들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해방이 되자 분노한 의령군민이 일본 신사를 부셔버려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신사 터를 지나 계단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웅장한 탑이 보인다.

○충혼탑

사진 =충혼탑
사진 =충혼탑

이 탑이 바로 충혼탑이다. 충혼탑은 망우당의 의병정신과 백산의 독립정신을 이어 받아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1958년에 세웠으나 낡아 2012년 12월 27일 군민의 정성을 모아 호국공원 충혼탑으로 새로 만들었다. 이 탑은 맞은편 구룡산에 있는 의병탑과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탑 뒷쪽에는 호국영웅의 부조가 새겨져 있고 부조 뒤에 위패봉안실이 있다.

필자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현충일이면 충혼탑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하곤 했다.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은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오르던 계단은 어린 나에게는 가파르고 오르기 힘들었지만 엄숙한 분위기 때문에 힘든 것을 내색할 수 없었다. 충혼탑 위패봉안실에는 할머니의 장남이자 필자의 큰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진=백부의 공병학교 졸업사진
사진=백부의 공병학교 졸업사진

백부는 6.25한국전쟁 발발 다음 해인 1951년 3월 25일 육군공병학교 일반공병과 제1기 졸업하고 수도사단 공병대대 육군2등 중사로 복무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아내를 두고 입대한 것이다. 고향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부모, 형제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형편이니 그는 전쟁에서 이기고 고향에 돌아가야 할 동기와 의지가 강력했다. 하나님께 의지하여 전쟁에서 살아남기를 기도했으나 포탄과 총알은 인간의 형편과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치열한 전투 중에 사망하였고 그 시신을 찾을 수 없었고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충혼탑 위패보관실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이와 유사한 사연을 가진 분들이 모셔져 있는 것이다.

왕띠를 다시 돌아보니 군청 뒤 소입과 상동네 사이에 시원하게 도로가 나 있다. 주민의 편리를 위하여 한 것이지만 아쉬운 점은 있다. 이 도로로 인하여 왕띠 쪽에 절벽과도 같은 단면이 생겨 사람들이 걸어서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진입로는 경사가 급해 올라가기 어려운 형편이다. 도로가 왕띠와 주민들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차단으로 인하여 왕띠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과 정서적 유대도 사라지게 될 위험에 처에 있다. 왕띠 초입에서 충혼탑까지 이어지던 아름다운 계단은 복원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개발의 잇점과 보존의 가치를 저울질할 때 보존의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개발을 신중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한 번 개발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유림 2022-06-05 21:32:15
충혼탑 근처에 옛정서가 가득한 나무가 있는지 몰랐어요! 내년 벚꽃이 필 때는 한번 보러 가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