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6)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6)
  • 의령 인터넷 뉴스
  • 승인 2022.04.14 21: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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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 땅 이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상을 보는 방법, 독특한 자연환경, 고유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땅 이름은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산을 지키고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의령문화원에서 펴낸 ≪우리고장 땅 이름≫, ≪宜寧의 地名≫,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의령향토문화연구소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김진수

 

□ 무전리(茂田里)

무전리(茂田里)는 의령읍의 동쪽에 있는 동리(洞里)이다. ‘무상(茂上), 무중(茂中), 무하(茂下)’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무전 지역은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宜春誌≫에 보면

茂田里古稱無等後改舞洞姜氏自東門洞移居爲世庄間出人

무전리는 옛날 무등(無等)이라고 불렀으며 후에 무동(舞洞)이라고 고쳤다. 강씨가 동문동(소입)에서 옮겨와서 세거하며 대대로 인물이 배출되었다.

무전리를 옛날에는 무등(無等)이라고 불렀으며 후에 무동(舞洞)으로 고쳤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1872년 의령현 지도에 보면 ‘무동(茂洞)’으로 표기 되어있다. 여러 가지 한자 표기 중에서 ‘우거지다, 풍성하다, 넉넉하다’라는 의미의 무(茂)자가 가장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무전리(茂田里)’라는 명칭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개편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옛 의령군 풍덕면의 무동(茂洞)과 덕암면(德巖面)의 죽전동(竹田洞)의 일부를 편입하여 무전리(茂田里)라 하였으며 지금도 이 이름을 쓰고 있다.

무전리는 의령천의 하류지역에 있고 남강이 가까운 지역으로 홍수 때 남강물이 역류하여 의령으로 흘러들어와 무전리 앞들은 상습적인 침수피해를 겪었다. 그래서 무전 앞들은 벼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풀이 무성하게 자라 가축을 기르기에는 적당했다. 이러한 사유로 말을 사육하는 목장이 있었던 것이다. 무상마을에 살고 있던 강씨 집안에서 사용하던 말이나 나귀를 사육하고 관리하는 곳 역시 무하에 있었다.

이처럼 의령읍 지역은 저지대이고 남강이 가까워 물난리를 자주 겪어 벼 수확이 변변치 못했다. 그러나 무전리 일대는 저지대인 앞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지대가 높아 침수피해를 겪지 않았다. 또한 마을 앞으로 흐르는 큰 개울이 있어 농업용수가 비교적 풍부하여 많은 벼를 수확 할 수 있는 곳이었다.

 

○ 사창社倉

사진 = 1872년 의령현지도, 성황단, 사창이 있다

이러한 안정적인 벼 수확이 가능했기 때문에 지금의 무하와 무중 사이에 사창(社倉)이 있었던 것이다. 사창제도는 평상시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는 구호(救護)사업을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주자(朱子)가 주장하여 중국 남송(南宋)에서 처음 시행됐다. 사(社)는 중국의 지방 행정단위로 우리나라의 면(面)에 해당한다. 이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의창(義倉)이 있다. 의창은 각 군현(郡縣)에 설치된 반면, 사창은 촌락에 설치됐다. 좋은 취지로 시작한 사창제도는 세월이 흐를수록 당초의 빈민구제 기구에서 높은 이자를 착복하는 기구로 성격이 변질됐다. 이런 폐단으로 인하여 사창이 폐지되기도 하고 필요성이 있어 다시 부활되기도 했다. 탐관오리들이 사창제도를 이용하여 농민들을 착취하는 폐단이 점점 심해지면서 이로 인하여 농민항쟁이 일어나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

 

○성황단城隍壇

1872년 지방지도 의령현 지도를 보면 동문외동에서 무전으로 넘어가는 고개(재애굴, 혹은 재와굴)에 성황단(城隍壇)이 있다. 성황단은 성황신(城隍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을 일컫는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성황단에 세운 사당(祠堂)을 뜻하는 말로 성황당(城隍堂)·성황사(城隍祠)·성황신묘(城隍神廟)·성황신사(城隍神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기도 한다. 성황신은 도성(都城)을 지켜주는 신으로 모셨으며, 각 고을에서 매년 5월 21일에 제사를 지냈다. 무전리 성황단은 의령읍성 지역을 지켜주는 신을 모셨던 곳이다. 이 신앙은 차츰 민간으로 퍼져 마을마다 고갯마루 등에 돌무더기를 쌓아 성황신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성황신’을 민간에서는 ‘서낭신’으로 일컫기도 한다.

 

○ 무하(茂下)/마당골

의령 토박이들은 ‘무하(茂下)’마을을 ‘마당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하에는 의령현에서 운영하는 말(馬) 사육 목장이 있어서 마장곡(馬場谷)으로 불렀으나 토박이들은 부르기 편하게 ‘마당골’로 불렀던 것이다. 마을 앞에 있는 제방이름은 호마제(呼馬堤)이다. 아마 제방위에서 방목한 말을 불러 모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던 것 같다. 호마제에 대한 기록이 《의춘지宜春誌》에 있다. 호마제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在豐德里長二百十八尺廣四尺

풍덕리(의령읍의 옛날이름)에 있다. 길이가 2백18척이고 넓이가 4척이다.

사진 = 호마제의 왕버들 군락
사진 = 호마제의 왕버들 군락

호마제가 있었던 곳에는 현재 130년 정도 된 왕버들이 10여 그루 있다. 왕버들은 풍수지리적으로 자연환경을 인위적으로 보완하여 좋은 기운이 충만한 곳으로 바꾸려고 하는 방법의 하나로 심은 것 같다. 또한 왕버들 숲은 바람을 막고 마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왕버들 숲이 마을을 약간 감추고 뒤로는 나직한 산이 무하 마을을 감싸고 있어 마을 경관이 좋고 아늑해 보인다. 마을 가운데는 반남 박씨 재실인 금양재(錦陽齋)가 있다. 마을 뒤쪽 천선암 뒷쪽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는데 궁유, 유곡, 용덕 사람들이 의령으로 왕래할 때 다녔던 곳이다. 고갯마루에는 길손이 요기할 수 있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무하마을 서쪽에 있던 ‘구릉배미’논, 무하 동쪽 끝에 대장간(성냥깐)이 있었던 ‘성냥껄’, 하천이 다리미 자루와 비슷하게 생긴 ‘다리비자리’, 무하 중앙에 나 있는 길인 ‘등골목’, 무하 서쪽에 있던 우물인 ‘통세미’, 용덕면 용소 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만들어진 ‘용수리보’ 등 정겨운 지명이 이제는 토박이들의 기억 속에서 조차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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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림 2022-04-21 19:06:42
지역 옛 이름이 참 정겹고 예쁘네요~ 이런 이름들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