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5)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5)
  •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사
  • 승인 2022.03.28 17: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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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 땅 이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세상을 보는 방법, 독특한 자연환경, 고유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땅 이름은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산을 지키고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의령문화원에서 펴낸 ≪우리고장 땅 이름≫, ≪宜寧의 地名≫,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사진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 구룡동(九龍洞), 구시골/구수골

‘구룡동(九龍洞)’은 의령읍 동동리(東洞里)의 마을 이름이며 의령읍 남서쪽 구룡산(龜龍山) 자락에 있다. 의령 토박이들은 ‘구시골’ 또는 ‘구수골’로 불렀다. 사투리 ‘구시’는 ‘구석’ 혹은 ‘구유(가축에게 먹이를 주는 그릇)’ 등의 뜻이 있으나 ‘구시골’의 경우 ‘산자락 구석진 곳’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

사진=구룡동 뒤쪽에 있는 불땅골, 서재골
사진=구룡동 뒷쪽에 있는 불땅골, 서재골

옛날에는 구룡동 앞으로 큰 하천이 흘렀는데 그 물길이 산에 막혀 돌아나가며 마을 앞에 깊고 큰 소(沼)를 만들었는데 그 소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동네 뒷쪽에 골짜기가 여럿 있는데 왼쪽이 ‘불땅골’이고 오른쪽이 ‘서재골’이다. 이 골짜기에 있는 아홉 개의 능선과 소에서 용이 승천한 전설이 합쳐져서 ‘구룡동(九龍洞)’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옛 마을이 있던 ‘불땅골’에는 당산나무와 조산이 있었고 그곳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서재골에는 진양 강씨들이 살다가 뒤에 무상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서당을 세웠는데 서당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서재골’이라 불렀다.

◎ 도둑골/도둑재/굴티재, 노천재

마을 남쪽에 있는 산에 만상, 만하마을과 연결되는 재가 있다. 구룡동에서 만하마을로 이어지는 재가 바로 ‘도둑골/도둑재’이다. 이 재를 넘으면 만하나루로 이어진다. 월촌 사람들이 만하나루를 이용하여 남강을 건너 의령 장에 수박이나 소를 팔곤 했다. 소판 돈을 노리는 도둑이 자주 출몰하여 도둑재/도둑골이라 했다. 재를 넘나드는 사람이 많아 주막도 있었다고 한다. 이 재의 다른 이름은 굴티재다. ‘굴’은 窟’ 즉 동굴이라는 뜻이고 ‘티’는 고개를 뜻하는 한자 ‘치峙’에서 유래하였다. 그래서 ‘굴티재’는 ‘굴이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지금은 옛 고개길에서 약간 윗쪽으로 포장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다. 재의 먼당에 올라서면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볼 수 있다. 구룡동에서 만상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노천재다.

 

 ◎ 배곡, 오망곡(誤望谷) 전설

의령읍에서 구룡동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보이는 골짜기가 ‘오망곡(誤望谷)’이다. 이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옛날 인조임금 시절 황덕유(黃德柔)가 의령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옛날 현감의 중요한 임무가 ‘산과 물을 다스려 재해를 막는(治山治水)일’이기 때문에 부임지의 지형을 살피는 것은 중요한 일이였다. 그래서 그가 부임할 때 용덕면 신촌리 고개에서 주변 산세를 굽어보니 의령 산세는 정말 아름다웠다. 특히 단풍이 물든 구룡산은 마치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金鷄抱卵形) 명당’으로 보여 감탄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절을 했다. 그래서 그곳을 배곡(현감이 절했던 고개)이라 불렀다. 다음날 현감이 구룡산을 가까이서 보니 명당이 아니라 산이 갈라져 음기가 흐르는 것이었다. 천하명당이 사실은 잘못 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감이 명당을 잘못 보았다고 해서 오망곡(誤望谷)이라 불렀다

오망곡에서 구룡동으로 조금 가면 산 중턱에 조그마한 굴이 있다. 마을 토박이들은 이 굴을 호랑이 굴이라 부른다. 굴의 입구는 좁으나 안쪽은 넓어 실제로 호랑이가 살았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포수가 이 굴에 살던 호랑이를 사냥한 뒤로 더 이상 호랑이가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장구덤이들, 찬새미들, 새논굼티

모두 구룡동 앞에 있는 들의 이름이다. 장구덤이들은 백야다리 위쪽에 있던 들판 이름이다. 장구덤이들에서 의령쪽으로 올라오면 찬새미들이 있다. 찬새미는 자굴산에서 땅속으로 스며든 물이 지하수로를 따라 흐르다가 구룡동 앞 냇가에서 솟아올랐다. 그래서 물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한 겨울에도 목욕을 하고 고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따뜻했다고 한다. 새논굼티는 구룡동 앞의 들 이름이다. 주변에 하천이 있었지만 들판이 높아 물을 끌어 올 수가 없어 논마다 물웅덩이를 파서 웅덩이 물을 퍼 올려 벼농사를 지었다. 필자가 구룡동 친척집을 방문할 때 보니 수양버드나무가 드리워진 웅덩이가 온 들에 점점이 박혀 있는 것이 마치 다른 나라의 풍경 같았다. 특히 모내기철에는 긴 장대 끝에 커다란 두레박을 달아 온몸으로 물 퍼는 농부들이 들판에 가득했다. 고개를 돌려 두레박 있는 쪽을 보며 장시간 물을 퍼야만 했다. 그래서 구룡동 사람들은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가 있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 사인합천이우식수재구휼비(士人陜川李祐植水災救恤碑)

사진=사인합천이우식수재구휼비
사진=사인합천이우식수재구휼비

구룡동에서 백야마을로 가는 산 기슭에(정암리 산 20-3번지) 사인합천이우식수재구휼비(士人陜川李祐植水災救恤碑)가 있다. 비의 내용은 을축년(1925) 6월 큰 홍수가 나 정암강이 넘쳐흘러 정암·백야마을이 물에 잠겼다. 집이 침수되고 농토가 유실돼 주민들이 길바닥에 자며 먹지를 못해 거의 죽기에 이르렀다. 이에 의령 만석군 이우식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에게 조와 쌀을 지급하여 구제하였다. 그가 준 구제미를 먹고 모두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정묘 단양절(丁卯端陽節)(1927년 단오)에 이우식 선생의 선행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운 것이다. 글은 안릉 이훈호(安陵李熏浩)가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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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림 2022-04-01 18:31:22
의령의 장소이름 유래가 재미있네요~ 앞으로도 또 다양한 동네 소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