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굴산 명경대(明鏡臺)를 찾아서
자굴산 명경대(明鏡臺)를 찾아서
  • 의령 인터넷 뉴스
  • 승인 2021.12.1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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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사진 =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경상남도의 '남명사상의 시대정신 발전전략(2018. 5. 30)'에 따르면 남명 선비문화 재조명을 통한 시대정신 확산 및 관광콘텐츠 활용을 위하여 총 67개 사업 약 600억의 예산으로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다. 67개 사업 중 하나인 '남명 숨길 조성사업'을 의령군에서 담당·추진하고 있다.

이에 의령군에서는 이 사업을 “남명조식선생 소개-남명선생 역사에 남다, 남명조식선생의 정신세계-남명선생 얼로 남다, 남명조식선생 일화-남명선생 이야기로 남다, 남명학 집대성-남명선생 학문으로 남다” 이상 4개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남명숨길’을 조성할 계획이라 발표했다. 즉 남명선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여 자굴산에 테마형 둘레길을 설치하고 그것을 관광명소로 조성할 계획인 것이다.

사진 = 경상남도 남명사상의 시대정신 발전전략
사진 = 경상남도 남명사상의 시대정신 발전전략

이 사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남명선생이 젊은 시절에 공부했던 자굴산 명경대이다. 그러나 선생이 자굴산 명경대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정작 명경대의 위치를 정확히 밝히지 않아 그 위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명경대의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는 것이 그 어떤 것 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명경대 위치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을 개인적으로 피력하고 있을 뿐 이를 공론화시키거나 또는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무슨 일이든 첫 단추를 제대로 꿰어야 다음 과정이 순조롭게 풀리는 법이다. 그 첫 단추는 바로 자굴산 테마형 둘레길 조성의 가장 핵심 부분인 명경대 위치를 확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의견을 수렴하여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곳을 결정한 다음 사업을 추진하여야 뒤에 다른 의견이 없을 것이다. 자굴산 명경대의 위치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필자는 명경대에 관한 여러 기록을 조사·검토하고 자굴산 둘레길을 여러 차례답사도 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였다. 그동안 조사한 성과를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알리고자 한다. 이 글이 다른 의견이나 자료를 가진 사람들과 활발한 토론을 촉발하여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해 내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 남명선생과 자굴산 명경대

남명 선생은 연산군 7년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 현 삼가면 외토리에서 태어났다. 자굴산 자락이다. 선생은 자굴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으며 자굴산을 평생 못 잊어 했다. 1526년(2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삼가 관동(冠洞)의 선영에 장사 지내고 삼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28세에 삼년상을 마치고 그 뒤 자굴산에 있는 암자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선생이 인생의 한창 때에 의령의 진산 자굴산에서 공부하며 그의 학문적 토대를 완성했던 것이다. 선생이 얼마나 공부에 몰두했는지, 그가 머물던 절의 승려에 의하면 “그가 거처하는 방은 온 종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깊은 밤이 되면 손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그가 아직 글을 읽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독서에 몰두했다. 책을 읽다 지치면 근처에 있는 명경대에 올라 사색하곤 했다. 자굴산 명경대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서 선생은 학문적 성취를 했고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확립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명경대(明鏡臺)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전설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서 심판을 받는다. 염라대왕이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그가 살아있을 당시의 행적을 이야기하면 많은 혼들은 자신이 전생에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우긴다. 그러면 그 혼을 명경대(明鏡臺) 앞에 세운다. 그러면 그 거울에는 그 사람의 살아생전 행적이 남김없이 비치게 된다. 그 비친 행적에 따라 십왕과 판관은 판결을 내려 죄 없는 사람은 극락문을 통하여 극락세계로, 죄 있는 사람은 사자를 불러 지옥문을 지나 지옥에 떨구어 넣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의 명경대와 자굴산 명경대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자굴산 명경대에서 남명 선생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어떻게 부끄럽지 않게 살 것인지를 고민했던 것이다. 다행히 남명 선생의 공부처인 명경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나마 조금 남아 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명경대와 관련된 기록

첫째, 《의령군지》에 명경대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의령군지 형승 방리(坊里)편에 갑을리에 대한 설명에 명경대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있다. 이것이 명경대 위치에 대한 비교적 구체적인 단서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甲乙里丁(昌原)崔(全州)兩氏所居後有明鏡臺南冥先生讀書處

*1)갑을리에는 창원정씨 전주최씨가 살고 있으며 뒷산에는 명경대가 있으니 남명선생 의 글 읽던 곳이다.

명경대가 현재 가례면 갑을리 갑을부락(쇠목) 뒷산에 있다는 것이다. 갑을 부락은 창원정씨 집성촌이고 자굴산 자락에 있다. 그리고 조금 아래 땀에 전주최씨 집성촌인 봉림부락이 있다. 이곳의 사람들은 자굴산 쇠목재를 넘어 삼가장을 자주 왕래할 만큼 삼가 지역과 교류가 빈번했던 곳이다. 그리고 이곳 어른들이 “우리 조상들은 명경대를 머리에 이고 살았다” 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이런 말로 유추해 볼 때, 명경대가 갑을리 갑을마을과 봉림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남명선생의 시

남명선생은 명경대에 관한 시를 2편 지었다. 그의 시를 보면 장소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주인이 되고 싶을 만큼 명경대를 좋아했다. 하늘 받치는 기둥이 부러져 이 골짜기에 박혔다고 표현할 만큼 명경대는 깎아지른 절벽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적 표현이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의령군지편찬위원회(1983), 《의령군지》, 16쪽.

 

명경대(明鏡臺)

-자굴산闍崛山에 있다.

斧下雲根山北立 : 도끼로 바위를 깍아 산 북쪽에 세웠는데,

袖飜天窟鳳南移 : 소매로 하늘 치듯 붕새 남쪽으로 날아갔네.

冷然我欲經旬返 : 나는 훌쩍 떠나 열흘 정도 지나 돌아오고자 하니,

爲報同行自岸歸 : 일행에게 알리노니 그대들은 해안에서 돌아가길

 

명경대(明鏡臺)

高臺誰使聳浮空(고대수사용부공) : 높은 명경대 누가 공중에 솟게 했는가?

螯柱當年折壑中(오주당년절학중) : 그 당시 오주(螯柱·하늘 기둥) 부러져 골짜기에 박힌 것이리

不許穹蒼聊自下(불허궁창료자하) : 창공이 저대로 내려오는 것 허락지 않은 것은

肯敎暘谷始能窮(긍교양곡시능궁): 양곡(暘谷·해 뜨는 동쪽)을 다 볼 수 있도록 하려 한 것이리,

門嫌俗到雲猶鎖(문혐속도운유쇄):속인이 이르는 것 싫어 문 앞에 구름을 드리웠고

巖怕魔猜樹亦籠(암파마시수역롱) :마귀의 시기가 두려워 바위를 나무가 에워쌌도다.

欲乞上皇堪作主(욕걸상황감작주) :하늘에 빌어 주인 노릇 해볼까도 하지만,

人間不奈妬恩隆(인간불내투은륭) : 은혜 융성한 걸 인간세상에서 질투하니 어쩔 수 없네.

두 번째 시의 한 연 “양곡(暘谷·해 뜨는 동쪽)을 다 볼 수 있도록 하려 한 것이리”이 장소에 대한 힌트를 준다. 즉 명경대는 양곡 즉 해가 뜨는 동쪽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대 위에서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곳이라 유추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그 대강의 위치는 갑을 마을 뒤편에 있으며 동쪽을 볼 수 있는 하늘의 기둥이 부러져 박힌 곳 즉 높은 바위절벽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2)경상대남명학연구소(2017), 《남명집》, 91쪽, 한길사.

3)경상대남명학연구소(2017), 《남명집》, 135쪽, 한길사.

 

셋째, 《의령군지》 대암臺巖 편에 있는 명경대에 대한 글

【新增】臺巖

明鏡臺 在闍崛山

南冥先生植嘗愛此臺往來棲息者累年常關門獨坐看書達曉靜嘿終晷有寺僧言其所處之室終日寂然無聲但時聞以手指抵書案微有聲因知其尙讀書也(出金東岡集)

 

명경대: 자굴산에 있다.

남명 조식선생이 대를 사랑하여 오고 가면서 들린 지 여러 번이다. 선생은 이 대에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글을 보면 밤을 새우고 고요하게 날이 저물 때 절에 중들이 말하기를 선생이 거처하는 방안에서 종일토록 아무소리가 없고 간혹 책상위에 손을 얹는 소리뿐임으로 글을 읽고 있는 줄을 알았다고 하였다.(김 동강 문집에 있는 말)

이것은 동강 문집에 있는 것을 《의춘지》와 《의령군지》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동강 김우홍은 남명의 제자이자 외손서이다. 남명선생이 여러 제자 중에서 특히 그를 좋아하여 자신의 외손녀 사위감으로 선택한 듯하다. 그러니 동강은 남명선생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명경대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명경대에 대한 글을 썼던 것이다. 그의 글에 의하면 명경대 근처에 남명 선생이 공부하던 작은 암자가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 자굴산 명경대의 위치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명경대는 가례면 갑을리 갑을 마을 뒤에 있으며 동쪽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곳이고 주변에 절이 있는 장소여야 하는 것이다.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장소는 쇠목재에서 올라가서 자굴산 둘레길로 들어서면 약 900m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곳이다. 현재 자굴산 둘레길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이다. 지번으로는 갑을리 ‘산 137임’이다. 바로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자굴산 산림생태문화체험단지’바로 위쪽에 있다.

* 4)김동강: 김우옹을 가리킨다. 그는 남명 선생의 외손녀와 결혼했다. 남명의 다른 외손서인 망우당 곽재우와는 동서지간이다.

 
사진 =자굴산 명경대로 추정되는 곳
사진 =자굴산 명경대로 추정되는 곳

이곳에는 옛날에 암자가 있었으나 6.25전쟁 때 불타고 없어졌다. 그 뒤에 대한불교 대승종 금정사가 있었으나 무허가 건물로 철거되었다. 현재는 절터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석간수가 나는 우물이 남아있고 주변에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한눈에 봐도 절이 있었던 곳이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망우당 곽재우가 15세에 들어가 공부한 보리사지를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절은 보리사지의 말사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시간은 달리 했지만 제자와 스승이 올려보고 내려다보고 할 수 있는 가까운 공간에서 치열하게 공부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망우당이 보리사지에서 공부할 때 스승의 공부처를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 어떻게든 알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명경대가 다른 곳일 가능성

9월 의령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의령문화사랑’ 회원들과 자굴산 둘레길 답사를 했다. 목적은 명경대를 찾는 것이었다. 이 때 많은 회원들이 금지샘 아래 절터샘 위에 있는 멋진 바위 덤을 명경대로 지목했다. 그리고 이곳을 명경대로 지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곳을 지목하는 이유는 첫째, 바위 덤의 모양이 멋있고 바위 면이 거울처럼 매끈하고 아름답다. 둘째, 남쪽으로 확 터인 전망이 좋고 바위 위에 여러 사람이 않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셋째, 주변에 절터샘과 금지샘이 있어 공부할 수 있는 절이 있었다. 이러한 논리로 이곳을 명경대로 지목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정황증거에도 불구하고 《의령군지》에 나와 있는 “갑을 마을 뒷산에 명경대가 있다”라는 기록을 뒤집을 만한 단서가 없다는 것이 약점이다. 그리고 의령의 종합인문지리지인 《의춘지》에 의하면 이 바위덤의 이름은 ‘신선암’이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神仙巖

阧立上平扶角攀上可坐四五十人南望數郡山川碁置星列而泗川之海瀰滿當前內有淸明社遺址今刻于巖面東有巨巖中空脈骨限南北有兩泉其名曰金井泉水從上落高可丈餘掬飮極冷中空處谽谺幽黯白日秉燭不可久支凜乎其不可深入天地間造化眞無所不有也

우뚝하게 서있는 그 위는 평탄하다. 돌 뿔을 잡고 올라서 보니 4·5십 인이 앉을 수 있었다. 남쪽으로 여러 골짝을 바라볼 때 산천 모양이 바둑점을 두었는 듯 별들이 벌려져 있는 듯 사천 앞바다는 번번하게 눈앞에 닥아 온 듯하고 청명사 남긴터에는 앞면에 글자 새겨있고 동편에 큰 바위는 속이비어 뼈만 남북으로 서 있는 거기서 샘물이 있어 금정천이라고 한다. 샘물이 바위 사이에서 흘러 떨어져 마시는 사람으로 가슴을 차갑게 한다. 그 굴속이 비어서 들어갈 때에는 컴컴하여 대낮에도 촛불을 밝혀야 하고 서늘하여 깊이 들어갈 수 없으니 천지간 조화는 참으로 이상한 곳도 있다.

《의춘지》의 신선암은 바로 금정천(금지샘) 바로 아래 있는 바위 덤을 지칭하는 것이다. 만약 이곳이 남명선생이 공부한 ‘명경대’라면 좀 더 유서 깊은 이름을 두고 ‘신선암’이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칠곡 주변의 마을에서도 이 바위 덤을 ‘명경대’라 부른다는 기록이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는 형편이다. 허백영 원장이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오히려 자굴산 근처의 여러 마을에서는 이 덤을 ‘신선덤’ 혹은 ‘신선바구’라 부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검토해 볼 때 명경대의 정확한 위치는 갑을 마을 뒤쪽에 있는 바위 덤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주장은 기록에 근거해야 한다. 현재까지 나온 기록을 덮을 만한 증거나 다른 기록이 없으면 갑을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 덤을 명경대로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결정이라 할 수 있다.

□ 나가는 말

사진 =남명숨길 안내판
사진 =남명숨길 안내판

‘명경대’의 위치가 확정이 되면 다음과 같은 것을 고려하여 사업을 추진했으면 한다.

첫째, 현재 자굴산 둘레길을 ‘남명 숨길’이라고 명명하고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남명 숨길’이라는 명칭보다 ‘남명 사색길’이라 하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현재 백암정에서 덕곡서원에 이르는 새로 조성하는 산책로의 명칭을 ‘퇴계 사색로’로 명명하면 자굴산의 ‘남명 사색로’와 서산 둘레길의 ‘퇴계 사색로’ 두 개의 길이 서로 상승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두 사상가가 한 분은 자굴산에서 또 다른 한 분은 백암정에서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좋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할 수 있으며 이는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자굴산 둘레길 주변 적당한 여러 곳에 남명 선생 시나, 그의 어록을 세워두면 재미와 교육적인 면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庸信庸謹 閑邪存誠 岳立淵沖 燁燁春榮

용신용근 한사존성 악립연충 엽엽춘영

언행을 신의 있게 하고 삼가며 사악함을 막고 성을 보존하라.

선처럼 우뚝하고 연못처럼 깊으면 화창한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남명선생의 좌우명>

남명선생의 여러 가지 어록을 읽으며 ‘남명 사색길’을 걸으며 상념에 잠기어 걸으면 더 의미있는 경험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셋째, 명경대가 현재 조성하고 있는 ‘자굴산 산림생태문화체험단지’와 같은 지번에 있다. 거리상으로 서로 가까워 두 지역을 잘 연결하며 개발하면 좋은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모노레일이나 산책로를 조성하면 바로 명경대까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명경대의 위치에 대한 공청회나 혹은 여러 가지 형태의 의견수렴 작업이 부족한 점이 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하여 공론의 장을 마련하여 활발하게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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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 2022-02-08 17:02:29
좋은 관광명소가 되겠네요!

이유림 2021-12-18 12:04:30
남명 사색길! 의령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될 것 같아요~~